[주말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15) 함안 채미정과 문풍루

knnews 2025. 5. 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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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왕위 찬탈에 관직 버리고 낙향
채미정 짓고 ‘백세청풍’ 현판 내걸어
언덕 위 정자 문풍루는 ‘생육신’ 상징
세상 등질 때까지 독서와 낚시로 소일


어계 조려가 조정을 등지고 여생을 보낸 ‘채미정’과 생육신을 상징하는 육각형 정자 ‘문풍루’./김홍섭 소설가/

어계 조려가 조정을 등지고 여생을 보낸 ‘채미정’과 생육신을 상징하는 육각형 정자 ‘문풍루’./김홍섭 소설가/

◇호배도강전설= 금은 조열의 손자였던 어계 조려(漁溪 趙旅, 1420~1489) 선생은 145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탄탄대로의 출세가도가 열려 있는 상황이었지만 세조의 왕위찬탈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봇짐 싸서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뿐만 아니라 세조가 단종을 영월에 유배했을 때는 함안에서 500여 리에 달하는 거리를 매월 세 번씩 찾아가 단종에게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청령포 나루를 지켜 사람들이 왕래할 수 없도록 했다. 단종에게 혹시나 해가 갈까 봐 염려한 것이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하자 불철주야 달려 한밤중에 청령포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는데 그 모습에 강물도 울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강물에 뛰어들려 하는데 누가 뒤에서 옷을 당겨 돌아보니 호랑이였다.

“상을 당해 천 리 먼 길을 왔는데 강을 건널 수가 없구나. 강을 건너면 임금님의 옥체를 수렴하겠지만 건너지 못하면 물에 빠져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잡아당기는고.”

그러자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고 엎디었다. 공이 그 뜻을 짐작하고 호랑이 등에 업혀 나루를 건넜다. 통곡사배 후 옥체를 수렴하고 나오니 기다렸던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후 스스로를 어계처사(漁溪處士)라고 칭하며 두문불출했다. 세조가 이조참의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고 오직 책과 낚시를 벗 삼아 살면서 끝내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는데, 그 충절이 ‘호배도강전설(虎背渡江傳說)’로 영월 읍지에 남아 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서기 1703년 숙종 끝자락에 세워진 이 서원은 1713년에서야 ‘서산서원’이란 제 이름을 내걸었다고 한다. 서산이란 이름은 동쪽에 백이산과 숙제봉이 있고, 생육신 절개가 은나라 백이, 숙제에 버금간다는 뜻에서다.
서산서원.

서산서원.

◇어계 조려 선생과 생육신= 조려는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 은자(漁溪隱者). 공조전서 조열(趙悅)의 손자, 증 사복시정 조안(趙安)의 아들. 1453년에 진사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숨어 살았다. 본관은 함안(咸安). 1420년(세종 2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453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불합리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 하여 폐위된 단종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망설임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 군북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456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여 수시로 단종의 안부인사를 원호의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원호, 이수형 등과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어린 임금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후에 원주 치악산에 올라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원호, 이수형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새겼다. 1457년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이 거듭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 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하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했다 한다.

그 뒤 단종왕의 넋을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모신 후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은거하여 사람들은 그가 머무르던 서산을 백이산이라 불렀다. 단종 승하 후 3년간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고 1489년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그를 여러 차례 관직에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후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698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자 이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이맹전, 원호, 남효온, 성담수와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후에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 지어졌다. 1781년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가증(加贈)되고 시호는 정절(貞節) 저서로는 후손 증 이조참판 조영석이 정리한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조려는 단종이 살아있을 때는 원호와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렸으며 단종이 죽자 3년간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고 세조가 즉위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살면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내며 스스로 어계(漁溪)라 하였다. 중국 주나라 강태공이 시절이 오기를 기다리며 홀로 낚시를 했다면 조선의 조려는 시절이 가기를 기다리며 홀로 낚시를 했던 셈이다.

조려는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했지만 생육신의 다른 인물들은 조정에 불려가지 않으려 괴이한 행동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김시습은 처형된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가에 임시 매장하고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뒤 지방을 떠돌며 유랑 생활로 생을 마감했다. 이맹전은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귀머거리, 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 년이나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도 그가 90세에 세상 뜨기 전 한 번 눈을 떴을 때까지는 진짜 소경인 줄 알았다고 한다. 원호는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 가자 영월로 가서 단종에게 문후를 드렸고 단종이 죽은 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귀향하여 은거했다.

남효온은 단종, 세조 때에는 어린아이로 단종이 사망할 때는 4살이었다. 그런 남효온이 생육신에 포함된 것은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고,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글을 사서에 넣었던 김일손이 그의 사형제이며,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기소설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한 행적 때문이다. 그런 남효은도 방랑 생활하다가 사망하여 생육신으로 평가받는다. 성담수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성희가 아버지이며 성삼문은 6촌 형으로 사육신 처형 후 세조는 그에게 참봉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고 은거했다.
채미정.

채미정.
문풍루.

문풍루.

◇채미정과 문풍루= 채미정 동쪽에 쌍안산이 있는데 숙종이 어계선조사 서문에서 조려의 절의가 중국 고대 백이숙제와 같음을 찬양한 이후 백이산으로 부르고 있다. 어계 조려가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정자라고 전하며 채미정 오른편에 백세, 왼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있다. 백세청풍의 ‘백세’는 나이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일백세대를 의미한다. 즉 오랜 기간 또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풍’은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백세에 걸쳐 맑은 기풍이 이어진다.’는 의미의 고사성어로, 중국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의 가르침과 고결한 삶이 후대 길이 전해지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강태공의 뛰어난 지략으로 주나라 문왕이 군사를 일으키자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주왕이 포악하기는 하나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려는 것은 결코 의롭지 못하다.”고 말렸지만, 결국 황제국이었던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선다. 그때 ‘의롭지 못한 주나라 곡식은 먹을 수가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뜻한다고도 한다. 또한 백이숙제의 비석에 주희가 쓴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채는 나물을 뜻하고 미는 고사리를 말한다. 즉 어계는 이곳에서 평생 고사리나 캐 먹고살겠다는 뜻으로 채미정을 짓고, ‘백세청풍’이란 네 글자를 내걸었다. 채미정 옆 언덕 위의 정자 문풍루는 특이하게도 육각형 정자인데 생육신을 상징한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옛 시절 풍문(風聞)은 바람에 세상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다. 조려는 여기서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먼 곳을 내다보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어쩌면 흐르는 바람의 소식에 귀 기울이며 세조의 시대가 끝나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서산서원에서는 좀 거리가 있지만, 채미정에서는 몇 걸음만 나가면 바로 낚시를 던질 수 있는 모로천이라는 작은 천이 흐른다. 조려가 채미정을 좋아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서산서원에 있는 생육신 사적비.

서산서원에 있는 생육신 사적비.
서산서원과 입구에 있는 홍살문.

서산서원과 입구에 있는 홍살문.

◇서산서원= 서산서원은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위치한 생육신(生六臣)을 모신 서원이다. 1703년(숙종 29년) 경상도 유학 곽억령 등이 사육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를 위한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건의하였고, 이에 김시습, 이맹전, 원호, 남효은, 성담수 등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1713년 (숙종 39년) 조정에서 서산(西山) 서원현판을 내리면서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년) 철거되었으며 이후 1981년 복원에 착수하여 1984년에 완공하였다.

서산서원의 건물로는 출입문인 숭의문을 지나 강학공간에 숭의당, 양정당, 상의재가 있고 내삼문인 경앙문을 지나 제향공간에 충의사, 소청각, 전사청 있다. 또한 육각정과 생육신사적비, 정절공사적비, 홍살문 등이 있다. 외삼문인 숭의문은 서산서원의 주 출입문이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강학공간이 제례공간의 앞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는데 서산서원도 강학공간의 강당인 숭의당과 숙소인 양정당, 상의재가 제례공간 앞에 자리한다. 서산서원을 비롯한 조려 선생 유적지는 모두 경남문화유산자료 5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홍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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