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공연, 온몸을 휘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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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패러다임의 전환
“‘합창, 피어나다(Voices in Bloom)’란 제목이 참 좋았어요. 공연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영국 팝밴드 콜드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이 ‘엄지 척’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 투어 콘서트로 내한했던 그가 쉬는 날이던 지난달 17일 조용히 세종문화회관을 찾아 서울시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한 것. 첫곡이 영국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의 ‘페스티벌 테 데움’이었다. 다른 행사 취재 차 이곳에 들렀다가 체임버홀에서 걸어나오는 마틴을 발견한 기자는 곧바로 그에게 뛰어갔다. “여기 어떻게 왔냐”고 묻자 “현지 문화예술을 경험하고 싶어 공연을 추천받아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계적인 팝스타도 반색할 정도로 수준 높은 순수예술 공연이 넘쳐나는 도시가 서울이다.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다. 최고 수준 공연이라도 객석이 빈 자리로 휑하다면 공들여 준비한 이들도 맥이 풀린다. 최근 주요 공연장들이 전에 없던 참신한 이벤트를 벌이며 눈길을 끈다. 팬데믹 이후 영화관에도 잘 안 가게 된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기획자들이 ‘색다른 경험 제공’으로 차별화를 꾀하는 것. 음악과 미술·미식·향기까지 ‘오감 콜라보’로 새로운 영감을 주는 공감각적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덕분에 국악관현악·컨템포러리 발레·오페라 등 대중이 낯설어하는 순수 공연예술 현장에도 새로운 관객이 유입되고 있다. 특정 장르의 예술 감상을 넘어 ‘경험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공연문화 현장을 소개한다.
피아노의 숲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밤하늘 별무리 사이로 음향의 빗줄기들이 온몸에 쏟아지는 초현실. 지난달 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서 잊지 못할 공감각을 경험했다. 빈 무대 위 딱 70개 놓인 빈백에 몸을 누이니 보이는 것은 밤하늘에 박힌 별빛인 양 점점이 밝혀놓은 조명 뿐. 눈을 감았을 뿐인데 1975년의 어느 날 키스 자렛의 전설적 실황음반 ‘더 쾰른 콘서트’가 녹음되고 있는 현장으로 타임슬립할 수 있었던 건 50여 대 스피커에서 360도 입체 사운드로 쏟아지는 현란한 타건, 키스 자렛의 생생한 아날로그 터치가 온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세종 인스피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지난달 28일 진행된 ‘리스닝 스테이지’. 단 70명의 관객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 위에 올랐다. [사진 세종문화회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07/joongangsunday/20250507084730232lpdm.jpg)
이벤트성이었지만 입소문을 타고 시도 자체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한정호 공연평론가는 “클래식 어쿠스틱이 약점인 세종문화회관이 역으로 스피커를 틀어놓고 몰입형 경험을 제공하는 건 기존과 전혀 다른 관객층 유입을 노린 것”이라며 “뉴욕의 더 셰드 등에서 선보인 몰입형 공연장 소닉 스피어가 기존 공연장을 완전히 벗어나는 접근이었다면,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전통적인 공연장이 변화하는 트렌드에 발맞춘 진화의 노력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17일엔 이 공연장의 로비에 노벨상 만찬에서나 봤던 길고 긴 테이블이 차려졌다. 간혹 박물관 로비에서 국빈 만찬이 열리기도 하지만, 이날의 귀빈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환갑(60주년) 기념 공연 전야제인 ‘헤리티지 만찬’의 피켓팅에 성공한 50명의 일반인이었다. ‘흑백요리사’ ‘냉장고를 부탁해’ 등으로 친숙한 최현석 셰프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발자취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코스를 맛보는 자리였다.
![지난달 17일 세종문화회관 로비에서 진행된 ‘헤리티지 만찬’. 최현석 셰프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발자취에서 영감받아 만든 메뉴를 선보였다. [사진 세종문화회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07/joongangsunday/20250507084730722uorv.jpg)
차분한 국악 연주가 흐르며 최현석 셰프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스타일에 맞춰 기본적인 한국의 맛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컨셉으로 준비했다”면서 된장 도너츠·캐비어 무조림·봉골레 수제비·수막새 디저트 등을 내왔고, 메인 디시인 갈비찜 리조또 순서엔 최 셰프가 직접 테이블을 돌며 트러플을 서빙하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공간과 음악에 대한 몰입감은 부족했다”고 지적했지만, 만찬에서 직관적으로 제시된 관현악단의 예술적 비전은 다음날 공연 ‘헤리티지’로 이어졌다. 국악관현악은 최근 국악 르네상스 트렌드에서도 소외된 비인기 장르지만, 객석은 이례적으로 붐볐다. 객석점유율은 69%로 지난해 대극장 공연 평균(51%)보다 18%포인트나 높았고, 연령대도 지난해 평균 32%였던 30대 이하 관객이 45%로 늘며 훌쩍 젊어졌다.
프로그램은 버라이어티했다. OB 단원들이 함께한 김영동의 ‘단군신화’, 황병기의 ‘침향무’ 등 고전적인 레퍼토리부터 뮤지컬배우 카이의 협연과 영화 ‘올드보이’로 유명한 이지수의 ‘개벽의 강’, 최지혜의 ‘미월’ 등 위촉 초연곡은 양악기 군단이 가세해 영화의 한 장면이 그려지는 웅장한 스케일로 울림을 줬다. 한 20대 관객은 “서양악기와의 조합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우러졌다. 이런 연주라면 자주 듣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국순당과 협업했던 ‘애주가’. [사진 국립극장]](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07/joongangsunday/20250507084731584dajm.jpg)
지난해 6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국순당과 협업한 야외공연 ‘애주가’도 전통주와 음악의 조화로 2회차 전석매진, 현장 추가 입석 판매로 객석점유율 110%를 기록하는 등 인기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술과 음악을 나누던 풍류 문화를 재현했는데, 이고운의 신곡 ‘권주가’ 등 노래마다 어울리는 전통주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연주자들도 어울려 술을 마시는 퍼포먼스가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30대 이하 관객이 51%로 40대 이상보다 많았을 정도다.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The Rising World:물의 정령’ 무대에 등장할 아르떼뮤지엄의 ‘스태리 비치’. [사진 예술의전당]](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07/joongangsunday/20250507084731867ckzg.jpg)
‘물의 정령’은 시청각 뿐 아니라 후각까지 챙기는 오페라다. 조향 컨설팅 브랜드 ‘센트 바이’가 ‘스태리 비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신비로운 물 향기에 공연장을 빠트린다. 관객은 시향 시트를 제공받아 향기를 맡으며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데, 오페라를 향기로 기억할 수 있는 굿즈도 제작 중이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은 미술관 원정에 나선다. 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처음 선보이는 ‘미술관 오페라 갈라: 미술관, 오페라를 만나다’는 개방된 전시공간인 서울박스에서 대표적인 오페라 명곡들을 들려주며 미술 관람객에게 접근한다. 지난 3월 호평 받았던 공연 ‘피가로의 결혼’의 대표 아리아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6월 공연될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속 경쾌한 행진곡들로 미술관을 채운다. 최상호 예술감독은 “미술과 오페라라는 서로 다른 예술 장르가 만나 풍성한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한 기획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업무제휴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 애호가에겐 오페라, 오페라 애호가에겐 미술과 사랑에 빠질 기회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쯤 되면 장르 파괴를 통한 경험 확장은 예술계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코로나 이후 발품 팔지 않아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졌지만, 남다르게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과감히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라는 소비 트렌드 분석이 공연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한정호 평론가는 “2025년 트렌드 키워드로 꼽히는 ‘경험’과 ‘영감’이 기업 경영이나 브랜드 마케팅을 넘어 공연장까지 파고들었다”면서 “전에는 공연 내용에만 신경 썼다면 이젠 공간과 포맷, 시간이나 향유 방식으로 차별화할 수밖에 없다. 공연을 전혀 안 보던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절박함의 산물”이라고 해석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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