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조국독립 꿈을 창공에 띄우다

2025. 5. 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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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17〉 전투기 조종사 권기옥
권기옥은 1901년 평남 중화군에서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딸을 계속 낳자 섭섭해서인지 ‘갈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어려서 평양 장대현교회 인근에 살며 가족이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장대현교회는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리며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목회를 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11살 때 은단공장에 취직해 가사를 돕다 12살이 되면서 교회의 배려로 숭현소학교에 입학했고 이름도 ‘기옥’으로 고쳤다. 늦게 취학해 가사를 도우며 학업 하는 중에도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2년간 1300시간 비행활동
조국독립의 꿈을 담아 비행한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전투기 조종사 권기옥. [사진 위키백과]
1918년 소학교 졸업 후 평양 숭의여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학업을 계속하면서 항일비밀결사 송죽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게 된다. 입학 이듬해 3·1운동 당시 평양의 만세시위는 이승훈·길선주 등 목사들이 비밀리에 준비했고 숭의여학교에서는 선생님들과 송죽회가 나섰다. 기옥 등 10명의 학생은 극비리에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일 정오 평양시내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시위가 이어졌고 일제경찰은 잔혹한 진압에 나섰다. 평양의 만세시위로 400여 명이 체포됐으며 기옥도 3주의 구류 후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독립공채 운반 등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도왔다.

그 해 10월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일제의 축하행사를 거부하고 만세운동을 벌여 200여 명이 체포됐고 기옥은 3주간 구류에 처해졌다. 구류에서 풀려난 기옥은 임정 파견 인사들과 학생들이 참여한 평양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됐다. 기옥은 임정 공채판매의 배후를 조사하려는 일제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해 수도 없이 기절했으나 끝까지 입을 다물었고 6개월을 복역했다. 1920년 3월 수감 중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기옥은 석방 후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해 순회·강연하며 독립운동 지원에 나섰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대원들이 체포되면서 활동이 중단됐다. 이후에도 임정의 독립단원들이 평남도청 경찰부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도왔고 이로 인해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다. 기옥은 체포 직전 진남포에서 멸치잡이 배를 타고 거친 풍랑을 헤쳐 3주 만에 산둥성에 도착해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정요인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행로를 걷게 된다.

어려서 평양에서 비행시범을 구경한 후 비행을 동경해 오던 기옥은 미국 캘리포니아 비행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던 노백린 임정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비행기로 일본을 공격하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1921년 독립운동가 김순애의 권고로 항저우의 기독교계 홍따오여학교에 입학해 각고의 노력 끝에 1923년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육군 항공대 창설과 조정사 양성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임정의 도움을 받아 비행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중국의 4개 비행학교 중 두 곳에서는 여성이라 거절했고 다른 한 곳은 비행기가 없었다. 기옥은 재무총장 이시영의 추천서를 받아 윈난항공학교 입학길에 나섰다.

1924년 윈난육군항공학교 시절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혹독한 훈련을 거쳐 그해 7월 프랑스제 꼬드롱 쌍엽기를 몰고 단독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사진 숭의여자대학교]
홍콩-하이난도-하노이를 거쳐 한 달 만에 윈난성 쿤밍에 도착했고 우여곡절 끝에 탕지야오 윈난성장의 친필 추천장을 받아 제1기 학생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혹독한 훈련에 이어 조종과 정비이론, 지상실습, 비행적성검사를 거쳤고 훈련비행 9시간 만에 1924년 7월 프랑스제 꼬드롱 쌍엽기를 몰고 단독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일제는 기옥의 항공학교 재학사실을 알게 되자 체포·암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1925년 2월 기옥은 윈난항공학교 제1기로 졸업했고 비행과 12명 졸업생 중 유일한 여성이자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에 비행기 구입을 건의했으나 무산되고 비행을 계속 하기 위해 중국 공군을 찾아 나섰다. 1926년 베이징 북쪽의 장자커우에서 군벌 펑위샹군의 항공대 부비행사(소령)로 임명됐다.

권기옥의 남편 독립운동가 이상정은 시인 이상화의 친형이다. 사진 왼쪽부터 시인 이상화, 권기옥, 이상정. [사진 독립기념관]
펑위샹군은 장쭤린 군대의 공격으로 후퇴하다 국민당에 합류했고 항공대는 해산하게 됐다. 기옥은 내몽골 지역으로 피난하게 되었을 때 펑위샹군에서 참모로 일하던 독립운동가 이상정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상정은 대구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계성학교, 오산학교 등에서 가르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작시한 시인 이상화의 친형이다.

이들 부부는 내몽골에서의 생활이 막막해지자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듬해 시작된 장제스 국민혁명군의 북벌전쟁(1926~28년)을 계기로 기옥은 상하이로 이동했고 국민혁명군이 공군을 창설하자 항공사령부 비행사로 임명되어 북벌전투에 참여해 싸웠다. 장제스가 난징에 우파정부인 난징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상하이의 항공사령부도 난징으로 이동하자 기옥은 국민정부 항공서 제1대 소속 비행사가 되었다.

1931년 만주침략에 나선 일본은 이듬해 1월 상하이를 공격했다. 장제스가 결사항전을 결정하자 즉각 공군기가 출격해 반격에 나섰다. 기옥은 정찰과 폭격임무를 수행했고 전투에 기여한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1933년 기옥은 항저우항공대로 발령받아 비행교관으로 있으면서 중앙항공학교에서 500여 명의 소년공군을 교육했다. 남편 이상정은 난징한족연합회 의열단에 관여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일제는 이들 부부를 계속 감시했다.

항공대는 1934년 군사위원회 소속의 항공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위원장은 장제스, 부위원장이 쑹메이링이었다. 이듬해 쑹메이링은 중국 대륙과 일본에 이르는 선전비행을 추진했으나 일본군의 중국 본토 진격으로 비행이 무산됐다. 비행에 참여해 도쿄로 향하려던 기옥은 천황궁에 폭탄을 투하할 각오였다 한다. 이후 기옥은 난창으로 이동한 항공위원회로 돌아왔으나 공군도서관으로 전보되면서 12년간의 비행활동이 끝나게 된다. 그때까지 기옥의 총 비행시간은 1300시간이었다. 공군도서관 근무 중 기옥 부부는 모함을 받아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8개월 만에 석방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해오자 국민당은 수도를 충칭으로 옮겼고 같이 이동한 기옥 부부는 1938년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1940년 기옥은 중령 계급을 달았고 이후 이상정은 임정 외교부 연구위원,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 등으로 임정에 적극 참여해 활동하게 된다. 임정이 충칭으로 옮겨오고 독립운동세력의 결집운동이 추진되면서 1943년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한 한국애국부인회가 출범하고 기옥은 사교부장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1988년 87세로 서거, 국립묘지 안장
1943년 임정은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준비를 위해 공군설계위원회를 설치하고 기옥 부부 등 8인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한국광복군은 조국침공작전을 세웠고 기옥은 도쿄 상공에서의 전투를 기대했으나 원폭투하로 종전이 된다. 해방 후 기옥 부부는 상하이로 돌아가서 남아있던 한국인들을 도왔다. 1947년 이상정은 모친 장례를 위해 귀국했다가 뇌출혈로 급서했고 후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상하이에 머물던 기옥은 1948년 12월 28년 만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제헌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공군창설의 산파역할을 하며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됐다. 1956년 기옥을 후원하던 신익희가 대통령 선거유세 중 급서하자 이듬해부터 활동영역을 달리해 『한국연감』 발행인이 되어 16년간 일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권기옥 지사는 불굴의 의지로 어려서부터 가진 여류 비행사라는 꿈을 이루었고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으며 대한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1988년 87세를 일기로 서거해 이제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잠들어 쉬고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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