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1) 청도 적천사의 문화유산

문정화 기자 2025. 5. 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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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기·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청도 적천사 탐방은 가을 단풍철이 제격이라는 말이 많다. 절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한 두 그루 은행나무 때문이다. 이 노거수는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으며, 수령이 최소 800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이 나무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즐기기 위해 많은 탐방객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수년 전 필자도 실견한 바이지만 실로 장관이었다. 다만 은행나무 주변만 북적댈 뿐, 몇 계단만 걸어 오르면 만나게 되는 적천사의 고즈녁함과 전각마다 숨어있는 여러 문화유산들은 거의 외면당하고 있었다.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해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이번에 추운 겨울날 일부러 적천사를 찾은 까닭은 소박한 절집의 적요(寂寥)에 몸을 맡기면서 여러 전각에 봉안된 문화유산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고 그 가치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도군 청도읍 화악산에 있는 적천사는 삼국시대 신라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진은 대웅전 모습. 김진홍기자

◆적천사 개관
청도에서 밀양으로 이어지는 화악산 산록에 기대어 있는 적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후대 기록에 664년(문무왕4)에 원효가 수도하기 위해 팠던 토굴이 이 절의 기원이라고 하나 사실인지 알기 어렵다. 그 후 828년(흥덕왕3)에 헌덕왕자였던 심지(心地)화상이 중창하여 절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것이 적천사의 본격적인 창건이 아닐까 싶다. 심지화상은 동화사의 중창주였기 때문이다. 신라 하대 선종 9산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開祖)인 적인선사 혜철이 잠시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천사가 대찰로 거듭 난 것은 1175년(고려 명종5)에 보조국사 지눌의 중창에서 비롯되었다. 전해지는 설화에 중창 이전에는 이 절에 도적떼가 살고 있었는데, 지눌이 가랑잎에 범 '호(虎)' 자를 써서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적떼를 쫓아냈다고 한다. 아마 이전 한동안 이 절이 상당히 쇠락했음을 암시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눌의 중창 이후 절에는 500명이 넘는 선승들이 수행했으며, 절에 딸린 산내 암자로 도솔암・은적암・백련암・옥련암이 있는 등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임진왜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1664년(현종5)에 왕실의 지원으로 일차 중수가 있었고, 이어 1690년대(숙종 년간)에 태허(泰虛) 스님이 주도하는 대중창불사가 있어 여러 전우(殿宇)가 중건되고 여러 불보살상이 조성・봉안되는 등 다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말 항일 의병항쟁기에 이 절이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자 관군들에 의해 누각과 요사채 등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전각으로는 입구에 있는 천왕문을 지나 무차루(無遮樓)의 마루 아래 계단을 올라서면, 중앙에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그리고 대웅전 뒤쪽 좌우에 조사전(祖師殿)과 영산전(靈山殿)이 자리한다. 이 중 명부전・무차루・적묵당 등은 199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아무튼 적천사는 규모면에서 그리 큰 절집은 아니다. 하지만 당우(堂宇)마다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품고 있는 사실이 놀랍고도 이채롭다. 지정된 문화유산만 하더라도 보물 1점(괘불탱 및 지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5점(목조 사천왕상, 대웅전, 대웅전 석가여래삼존불상, 명부전 석조 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일괄, 무차루 석조 아미타여래좌상) 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지면 관계상 적천사 보유 문화유산들중 중요한 몇 가지의 가치를 짧게 소개하기로 한다.
적천사 괘불탱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오른 어깨로 비켜 올려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보살 형태의 독존도 형식 그림으로, 다른 인물이나 배경을 전혀 표현하지 않은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괘불탱(掛佛幀) 및 지주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은 무시로 볼 수 있는 불화가 아니다. 사월 초파일 등 절에서 큰 법회가 열릴 경우에 대웅전 앞마당의 돌로 된 한 쌍의 지주에 각각 기둥을 세워 거기에 내다 거는 탱화이다. 1695년(숙종 21)에 제작된 이 괘불은 그 크기가 약 12.5m×5.27m에 달한다. 현재는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무차루 안에 설치한 보관함에 보존되고 있다. 괘불의 본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든 채 두 발을 약간 벌리고 정면을 향해 서 있는 독존 형식이다. 이런 형식의 괘불을 보통 장엄신 괘불(莊嚴身 掛佛)이라고 한다. 보관은 중앙에 5위의 화불(化佛)을 안치하고 좌우에 금박의 봉황장식을, 가장자리에는 화염보주를 장식하였다. 광배는 머리에 두광(頭光)만 묘사하였다. 양발이 딛고선 연화족대(蓮花足臺)는 붉은색과 분홍색으로 색상을 달리하여 채색하였다. 화기(畵記)를 보면 이 괘불은 수륙재(水陸齋) 개최에 맞추어 조성되었으며, 화승으로 수화승 상린과 해웅・지영 등 5명이 참여하였다. 한편 대웅전 앞에는 괘불을 걸기 위한 괘불대의 돌로 된 한 쌍의 지주가 남아 있는데, 1701년(숙종27)에 거사 경순(敬順) 등이 참여하여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어 시대상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괘불탱을 걸기 위한 괘불대 지주, 대웅전 앞에 석조로 서 있다. 김진홍 기자
◆대웅전과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
각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문화유산은 적천사의 주불전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탐방객들이 종종 들러보는 곳이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조선 후기적인 특성이 많이 보이지만 내부의 천정 구조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 수법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은 좌우의 협시보살과 본존불로 구성된 여느 삼존불상과는 달리 세 분의 부처를 모셨다. 가운데에 사바세계를 관장하는 현세의 석가불을 두고 왼쪽에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 오른쪽에 동방 유리광세계의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한 특징인 수더분하고 친근한 모습의 불상 들이다.
대웅전에 모신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1636년 조각승 현진이 제작했다. 김진홍 기자

이들 불상은 복장유물 조사 중 조성 시기와 경위, 조각승 등이 기록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발원문에 의하면, 이들은 1636년(인조14) 수조각승 현진 등에 의해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현진은 17세기 초반 왕실 불사까지 책임졌던 조선 제일의 조각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진과 그 계승자들로 이어진 현진・청헌파(玄眞・淸憲派)는 17세기 후반을 거쳐 18세기에 이르기 까지 조선후기 불교 조각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유파였다. 이와 더불어 더 주목되는 것은 불상 조성 당시가 병자호란으로 온 나라가 난리통에 빠져있던 시기라는 사실이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도 전장에서 한 걸음 떨어진 이곳 산사에서는 지극한 불심에 가득찬 승려들이 걸림없이 불상을 조성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 석가여래불상 옆에는 조금 앙증맞아 보이는 소형의 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원래 무차루에 봉안되어 있던 석조 아미타불좌상(경상북도 유향문화유산)을 도난을 염려한 주지스님이 현재 위치로 이안(移安)한 것이다.
이밖에도 적천서에는 천왕문의 좌우에 모셔진 목조 사천왕상 의좌상과 명부전의 석조 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등 여러 존상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각각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가 밝혀져 있는 역사적・문화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유산들이다. 천천히 자세히 살펴볼수록 숨은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적천사 탐방을 적극 권하고 싶다.
이문기(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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