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기 좋은 나라 [지평선]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17년 미국 대형 신용평가사 에퀴팩스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1억4,000만 명의 사회보장번호, 이름, 생일 등이 유출됐는데, 2년 뒤 피해자들에게 7억 달러(약 1조27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2021년 발생한 페이스북 정보 유출 사건에선 7억2,500만 달러(약 1조385억 원)가 배상금으로 책정됐다. 같은 해 이동통신사 티모바일의 유출 사건 배상금은 3억5,000만 달러(약 5,013억 원)였다. 미국은 벌금이나 과징금도 세다. 2019년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개인정보를 유출한 페이스북에 50억 달러의 천문학적 벌금을 매겼다.
□ 물론 ‘소송의 나라’이자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미국과의 단순 비교는 쉽지 않다. 한국은 ‘딱 손해를 입힌 액수’만큼만 물어주는 게 기본이라 좀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부터 소개할 한국 법원의 판결들을 보면, 단순히 손해배상 개념 차이만이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 2018년 대법원(주심 권순일)은 870만 명 정보를 잃은 KT에 배상금 지급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건이 발생한 2012년 기준으로 할 만큼 했다는 게 이유다. 과징금 부과도 쉽지 않다. 2021년 대법원(주심 안철상)은 방송통신위원회가 1,170만 건 정보 유출로 KT에 매긴 과징금을 취소했다. 여기서 더 기가 막힌 건 취소된 과징금 액수다. 7,000만 원. 개인정보 한 건당 과징금이 겨우 6원이다. 이런 솜방망이도 막아주는 법원이 있는데, 기업이 정보 보호에 투자하지 않는 건 ‘매우 합리적 선택’이다.
□ SK텔레콤 유심 사태 이후, 온라인에선 ‘대한민국이야말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터져 나온다. 기업이 우는소리 하면 정부나 법원이 또 봐줄 거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주식회사가 주주 눈치를 보도록 법을 바꾼다는데, 온갖 전문가들이 ‘나라 망하게 할 거냐’며 대신 걱정해 주는 나라. B2C 기업이 소비자 마음보다, 과점체제를 지탱하는 감독기관 심기를 더 살피는 나라다. 개인정보 보호가 자선에 가까운 개념인데, 정보보안을 외쳐 본들 허무할 뿐이다.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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