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무해하고 유쾌하며 러블리한 '바이러스'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사랑에 빠지는 바이러스라는 게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영화 '바이러스'는 '톡소 바이러스'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을 그린다. 이 바이러스의 감염 증상이 독특한데,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끼게 된단다. 한마디로 사랑에 빠지기 최적화된 바이러스란 소리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 그런 바이러스를 원할까?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는 N포 세대가 넘실거리는 세상인데 말이다.
번역가 옥택선(배두나)는 우울하다. 원래도 의욕도, 웃음도, 연애 세포도 바닥난 채 우울모드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하필 비 오는 어느 날 최악의 소개팅까지 경험했다. 무슨 연구소 박사라는 '모쏠' 연구원 남수필(손석구)은 약속 시간에 늦더니 주절주절 실험쥐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또 황급히 일이 생겼다며 가 버린다. 심지어 택선의 우산까지 들고 가는 바람에 택선은 비를 쫄딱 맞고 귀가해야 했다. 그런데 그 수필이 그날 밤 택선의 집에 '애프터'를 온다. 게다가 낮과는 달리 그는 갑자기 택선에게 프러포즈까지 한다! 술에 취해 잠든 수필을 두고, 택선은 그가 먹다 남긴 어묵꼬치를 씹었다. 그게 문제였다.
다음날, 택선은 어쩐지 전날과는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뜬다.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눈길도 주지 않던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챙겨 입는다. 자동차 딜러가 되어 매일 광고 영업 문자를 날리던 초등학교 동창연우(장기하)의 메시지에 설레 무작정 그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젯밤 그 남자 수필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수필이 남긴 메시지에 따르면 택선은 톡소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지금의 이 감정들은 그 바이러스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고칠 수 있는 건 이균(김윤석) 박사밖에 없다. 그렇게, 택선은 이균 박사와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 여정에서 택선은 이균 박사에게 빠져든다. 이건 사랑일까, 바이러스 때문일까?

'바이러스'는 사랑의 감정을 바이러스에 대입하는 독특한 발상이 돋보이는 영화다.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그 옛날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랑 바이러스라는 게 묘하게 연결이 되는 것도 같다. 흔히 영화에서 바이러스는 감염으로 인한 소동과 공포를 일으키는 매개인지라 재난물에 주로 등장하곤 하는데, 이 영화의 톡소 바이러스는 치사율 100%의 위험천만한 바이러스임에도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기분이 날아오를 듯해 24시간 춤을 추게 되는 바이러스라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아이러니하게도 소재가 바이러스인 덕분에 '바이러스'는 오랜 시간 창고에 묵혀야 했다. 2019년 촬영을 마쳤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2020년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로 우리는 팬데믹을 맞이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이제는 벌써 아득한 느낌이 나는 팬데믹 시대를 떠올리게 되는 요소가 가득하다. 감염이 의심될 땐 고개를 돌려 팔꿈치 안쪽에 기침을 하라든가, 감염자는 국가에 의해 철저히 격리된 생활을 한다든가. 게다가 배두나는 영화 '괴물'에서 괴물로 인한 바이러스 감염자란 누명을 쓰고 국가에게 쫓긴 전력이 있어 관객들이 순간순간 오버랩되는 기억이 많을 듯하다.
'바이러스'는 쓰라리고 힘들었던 팬데믹의 기억을 소환하지만, 이미 지난 과거이기에 힘들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바이러스를 대하는 배우진의 궁합이 훌륭하다. 특히 배두나가 오랜만에 데뷔 초의 엉뚱하고도 독특한 4차원 매력을 되살려 눈길을 끈다. '다음 소희'나 드라마 '킹덤' 시리즈와 '비밀의 숲' 시리즈 등 최근 들어 장르물에 주로 출연했던 배두나지만, 사실 배두나는 그 오묘하고 독특한 비주얼로 '플란다스의 개' '고양이를 부탁해'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공기인형' 같은 엉뚱 발랄한 영화에서 빛을 발했던 배우 아닌가. '바이러스'에서 여전히 오묘하게 사랑스러운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배두나와 김윤석과의 케미도 어색한 듯 하지만 괜찮게 즐길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와 백만 광년은 떨어져 보이는 김윤석이지만, '바이러스'에선 제법 로맨틱 코미디 남자주인공으로 어울려 보인다. 김윤석은 택선을 어르고 달래며 치료제를 만들어야 하는 이균의 난감한 입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직진으로 들이대는 택선 앞에 속수무책 당하는(?) 모습이 웃음과 함께 귀여움을 자아내니, 역시 뛰어난 배우란 이런 것인가 놀라게 된다.
시트콤 '감자별 2013QR3'로 연기를 시도한 적 있는 장기하의 열연도 눈에 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자연스러운 병풍 연기로도 웃음을 안긴 바 있는데, 여기서도 자연스러운 연기로 웃음을 준다. 톡소 바이러스의 최초 감염자가 되어 택선을 변화시키게 만든 주범인 수필 역의 손석구는 말할 것도 없다. 숨막히는 '모쏠'의 소개팅부터 감염되어 온갖 주접을 떠는 장면까지, 특별출연이지만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휘한다.

영화 후반부에 조금 힘이 빠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바이러스'는 독창적인 이야기와 사랑스러운 배우들의 연기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극장에서 꼭 봐야 할 영화라고 묻는다면 조금 자신이 없긴 하다. 그러나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 시대에, 이유 없이 사랑에 빠져도 된다고 소리 높여 말하는 영화를 보는 건 또 각별한 느낌이지 않을까. 설레는 봄, 묘한 설렘으로 잊혀졌던 감각을 깨우고 싶다면 추천.
이지민 작가의 소설 '청춘극한기'가 원작으로, '사과' '범죄소년' '우리 지금 만나' 등을 연출한 강이관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러닝타임은 98분이며, 5월 7일 개봉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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