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정보라 작가가 지난달 18일 미국 시애틀 노웨스콘에서 열린 필립 K. 딕 상 시상식에서 '그녀를 만나다'의 마지막 대목을 낭독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 3대 SF 문학상 중 하나인 필립 K.딕상 시상식에서 고(故) 변희수 하사의 이름이 불렸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 최초로 이 상의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소설 속 한 대목을 낭독한 것인데요. 아쉽게 수상은 불발된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에 수록된 '그녀를 만나다'의 마지막 문장들입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울었다. 그 말이 너무나 듣고 싶었다. 그녀가 행복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으니 이제 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화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혼자서 마음껏 울었다. 울면서 그 서늘했던 봄날의 지하철을 생각했다. 노란 잔디가 아직 되살아나지 못했던 차가운 광장의 나지막한 외침을 생각했다.
"힘을, 보태어, 이 변화에."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
변 하사는 2020년 성전환 수술 후 강제전역 처분을 받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두 번이나 오체투지를 했던 정 작가는 고인을 기억하며 이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 '나'는 왕년에 데모 좀 많이 했던 120세 할머니입니다. '그녀'의 팬미팅에 갔다가 혐오세력이 일으킨 폭탄 테러에 휘말립니다. 팬클럽 회장은 살해된 동지들을 애도하며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2021년 3월 변 하사가 사망했을 때 그를 추모하는 이들은 서울지하철 시청역에서 2호선을 타고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책을 읽으며 순환선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서울광장에 모였습니다. 정 작가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더 좋은 세상을 위해 함께 나아갈 것"이라는 의지를 다지면서요. 그의 '싸우는 이야기'는 계속 될 테지요. "문학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치정극을 쓰는 것"이라는 그의 꿈도 언젠가는 이뤄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