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짐에 저항하는 방법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한겨레 2025. 5. 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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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선거 공관 재외선거 담당자 투표관리 교육’에서 참석자들이 재외투표용지 발급기 운영 실습을 하고 있다. 수원/연합뉴스

권김현영 | 여성현실연구소장

지난겨울을 지나 봄까지 광장에서 윤석열 탄핵 광장을 만들었던 박남경(22)씨는 요즘은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걸까요? 그는 몇번이나 자신이 중도라고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중도란 차별 금지와 인권 존중이다. 윤석열 탄핵 광장의 시민발언대에서 나온 목소리와 같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서 만든 ‘천만의 연결’이 지난 2월 온라인 소통 공간을 만들어 이 공간에 모인 목소리 651개를 중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나온 목소리는 차별 금지와 인권 존중이었다. 이것이 광장에서 나온 중도의 정의였다. 하지만 여의도 정치의 계산법은 달랐다. 압도적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중도 보수’ 선언을 했다. 그동안 보수로 알려졌던 세력이 알고 보니 대부분 극우였으므로 이제 ‘보수가 중도’라는 셈법이었다. 이 정치공학이 바로 광장의 목소리를 지우고 보수로 중도를 대표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신을 진영의 일원이라기보단 민주주의를 구하는 시민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대표되지 않는다. 보수가 곧 중도가 된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재명 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된 전 한나라당 의원 이인기는 2009년 용산 참사 희생자들에게 자살 테러라는 막말을 한 사람이다. 이재명 후보의 출마 선언과 지금까지의 정책 기조는 ‘먹사니즘’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2009년 1월에 망루에 올랐던 이들도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살 폭탄 테러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생각하는 먹사니즘은 대체 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혹자는 광장의 목소리를 조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것이 문제라고 하고, 혹자는 구체적인 정책 요구를 통해 정치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시도하라고도 한다. 다시 문제의 해법을 정치가 아니라 시민에게 풀라고 돌린다. 자신들은 먼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지만, 광장의 시민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서 광장에 나온 게 아니었다. 먹고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나온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각자도생하며 경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협력과 공존의 인간으로 살고 싶어서 광장에 나온 것이다. 이런 식의 지워짐은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저 멀리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가까이는 2025년 한국의 탄핵 광장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했지만 한번도 그 결실을 수확하지 못했다. 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몰아주었지만 그 결과는 철저한 배신으로 돌아왔다.

남은 것은 오직 글쓰기였다. 프랑스 혁명기 작가 올랭프 드 구주는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갖지 못하고 공직도 맡을 수 없으며 집회 토론에 개입할 수도 없고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는 처지에서 활동적이며 생각 많은 여자가 글 쓰는 일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죽는 날까지 말하고 글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올랭프 드 구주가 1788년 발표한 ‘한 여성 시민이 쓴 민중에게 보내는 편지 또는 애국 기금 계획’에는 한 세기 뒤에도 실행 여부를 고민하게 하는 전위적인 제안들이 담겨 있다. 노인들을 위한 수용 시설, 노동자 자녀를 위한 집합소, 실업자를 위한 공공 작업장을 비롯하여 이 모든 사회사업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치세’를 제안했고, 유명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선행에 관심을 쏟는 언론들에 실제로 가난이 무엇인지를 알고 서로를 돕는 가난한 사람들을 조명하라고 일갈했다. 1992년 미국 대선 후보로 출마한 여성 퀴어 시인 아일린 마일스의 무기 역시 글쓰기였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선거운동을 하며 가난하고, 병들고, 비정상적인 존재들을 대변했다. 그의 선거운동은 시 낭송회였고 그의 출마선언문은 “정상이 아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시였다. 미국 예술가 조이 레너드는 그의 출마를 지지하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재정의하고 대의정치의 한계를 꿰뚫었던 유명한 연설문, “우리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를 썼다. 이 말들은 그대로 역사에 남았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는 무엇보다 ‘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쓰고, 기록하고, 듣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지워짐에 저항하는 방법이고, 이 저항은 실패한 적이 없다. 글을 쓴다는 건 세계의 한계를 다시 짓는 것이다. “그 실행의 지평으로, 저 바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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