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봄의 반대편에서

2025. 5. 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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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봄날 찾아온 친구
"돈 좀 빌려줄 수 있니
거절해도 돼, 피하진 말아줘"
거절보다 더 큰 상처는
끊어지는 인연들 아닐까

사방에 벚꽃이 그득하던 4월이었다. 나는 꼭 스무 살이었고, 대학에 입학한 지 두 달여 만에 만사가 귀찮아진 참이었다. 뭔가 다른데.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으로 학교를 오가자니 봄날도 봄꽃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구에게 연락이 온 건 그때였다. 구는 내게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시간을 길게 뺏으면 미안하니까 내가 너희 학교로 갈게." 약속 시간보다 일찍 찾아온 구가 본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단조롭게 꽃잎을 흘리는 벚나무와 통나무 벤치와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거기 팻말처럼 꽂혀 있는 구가 이상하리만치 어색했다. 이전의 구는 늘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어두운 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꽉 조여 묶은 채였다. 굳게 다문 구의 입술이, 반짝거리지만 중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진 구의 구두가 나는 어렵고 두려웠다.

"혹시 돈을 좀 빌릴 수 있을까?" 구가 말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녀 어수선한 벤치에 앉아 자신의 어깨로 꽃잎이 내려앉는 줄도 모르고, 구는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조금씩 도와주셨는데 아직 많이 모자라.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내게 빌려줄 수 있니?"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구가 급히 덧붙였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주말 동안 생각해보고 월요일에 답해줘." 나는 당장이라도 답할 수 있었다. 대출은 정말 급할 때 나를 위해서만 쓸 거라고, 우리가 빚을 각오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다. 동시에 내게서 그런 대답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찾아온 구의 상황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스무 살의 구는 만화경 안의 유리 조각처럼 복잡하게 퍼지고 섞여 내가 영 모르는 사람이 돼 있었다. 내가 모르는 구가 말했다.

"거절해도 괜찮으니까 내 전화를 피하지만 말아줘." 구는 돈을 빌리러 다니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쾌활하고 살가운 성격의 구는 친구가 정말 많았는데 그 친구들이, 친척들이 이제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정말 힘들게 하는 건 이렇게 한꺼번에 모든 사람을 잃어버리게 됐다는 사실이라고 구는 말했다. 그러고는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내내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구에게 안부를 묻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볼이 홀쭉해진 걸 보면서도 얼굴이 낯설어졌다고 생각했지 밥 한 끼 사줄 생각을 못했다. 나는 정말 옹졸한 사람이구나. 그런 자괴감 때문인지 나는 있는 대로 뾰족해졌다. 일요일 저녁 연인과의 다툼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됐지만 도무지 끝이 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서로의 모든 것을 비난하며 밤새 싸웠다. 더 모진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날이 밝을 즈음엔 휴대폰 전원을 꺼버려야 할 정도였다.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학교에 가는 동안 나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하루가 그런 식으로 소리 없이 저물었다. 나는 월요일 밤이 돼서야 구를 떠올렸다. 전원이 꺼져 있는 휴대폰에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을 구를. 사람을 너무 많이 잃었어, 너까지 나를 피하진 말아줘. 돈을 빌려 달라는 말보다 더 간절하게 전했던 그 말을.

봄날, 벚꽃이 질 때마다 나는 그날의 기억과 마주친다. 꽃잎이 떨어지는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구를 봄의 반대편으로 힘껏 밀어내버린 사람이 나인 것만 같다. 그러니 어느 봄날의 나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목이 뚝뚝 꺾이는 꽃들 속에 팻말처럼 꽂혀 있다. 봄의 반대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구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다만 서 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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