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만 봐도 겁나요" 산불 트라우마 시달리는 아이들
231명 일상생활 어려움 호소
이재민 학생도 132명이나 돼
"또 불나면 탈출 못 할까" 걱정
피해 컸던 만큼 불안·충격 심해
전문가들, "지속적 관리해야"

3월 발생한 산불로 살던 집과 가게가 모두 타버린 경북 영덕군 축산면 이재민 박모(48)씨는 며칠 전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창 밖 노을을 가리키며 “산불이 난 것 같다”고 말한 것. 박씨는 “불이 나고 시간이 한참 지난 데다 학교에 잘 다니고 별말이 없어 걱정하지 않았는데 불안하다고 해 무척 놀랐다”며 “집과 가게를 수리하는데 급급해 정작 아이한테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고 토로했다. 또 “뒤늦게 학교에 이야기하고 심리검사를 요청했다”며 “이번 산불 피해가 워낙 커 다른 아이들도 괜찮은지 걱정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북 의성군에서 시작해 안동·청송·영양·영덕 등 5개 시·군을 휩쓴 초대형 산불이 꺼진 지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상당수 청소년들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도교육청이 5개 시·군에서 산불 피해가 컸던 초등학교 19곳과 중학교 9곳, 고등학교 6곳 등 총 34개 학교에서 학생 901명을 대상으로 불안과 우울, 충격 척도 등을 검사한 결과, 231명(25.6%)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나타냈다. 학생들은 대체로 “산불로 부모님이 재산을 다 잃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된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또 불이 나면 대피할 수 있을까 두렵다”고 호소했다.
경북도교육청은 PTSD 증상을 보인 학생 231명이 재학 중인 학교 34곳에 전문상담교사를 배치해 1대 1로 4~8회에 걸쳐 심층 검사와 상담을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3명은 심각한 불안과 공포를 호소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필요한 것으로 파악됐다.
도교육청은 의성에서 80㎞ 거리 영덕까지 4시간 만에 초토화할 정도로 불이 빠르게 번졌고 주민 26명이 숨지고 3,819채의 집이 탔을 만큼 피해도 커 학생들의 불안과 충격이 상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북 산불로 살던 집이 전부 타 이재민이 된 학생(유치원생 포함)은 안동 50명, 영덕 41명, 청송 32명, 영양 6명, 의성 3명 등 132명이나 된다. 교육청은 5개 시·군에 소재한 초·중·고교 150곳의 학생과 교직원 약 2,000명을 대상으로 재난 트라우마 예방 심리안정화 교육도 진행했다.


신미순 교육청 학생생활과 장학사는 “산불 피해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오지나 어촌이라 학생들도 대피 중 극심한 공포를 겪었다”며 “1차 심리 검사 때 민감한 반응을 보인 학생을 중심으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산불피해 지역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심리적 안정을 취하도록 교육당국은 물론 지역사회가 연대해 관심과 지원을 쏟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내 트라우마 치료 권위자인 이영렬 국립법무병원장은 “주위 환경에 예민한 청소년기라 쉽게 두려움과 절망에 빠질 수 있다”며 “심리적 안정을 찾을 때까지 용기를 심어주고 꾸준히 정신적 고통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K팝 콘서트나 축제를 여는 것도 트라우마 치료에 효과가 크다”며 "학교와 교육청, 지역사회가 힘을 합쳐 관심을 갖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덕= 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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