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는 연구비가 얼마 필요한가 [김민형의 여담]

한겨레 2025. 4. 3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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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미국 하버드대가 있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트럼프는) 하버드에서 손을 떼라”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몇년 전 타계하신 시니어 수학자 한분과 1960년대 미국 과학 재단의 팽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옛 소련과의 경쟁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특히 1950년대 말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때문에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국가적으로 강조되면서 실용성과 다소 거리가 먼 순수 수학에도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할 때다. 하버드 대학에서 일하던 그는 연구비에 관한 과학 재단의 홍보를 굉장히 의아해했다고 한다. 가르치면서 받는 월급 외에 돈을 받을 이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오륙십년 전 학자들의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많다. 영국에서 제일 존경 받는 원로 수학자 중 하나는 옥스퍼드 대학의 젊은 부교수 시절에 되도록 강의를 많이 맡으려고 했단다. 강의 시수에 따라 월급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익숙한 ‘연구 중심 대학’의 역사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가령 19세기 초 프러시아에서 빌헬름 폰 훔볼트 같은 인물의 영향으로 연구와 교육을 겸비하는 대학의 구조가 처음 형성됐다고 하지만 그가 창건한 베를린 대학 강사와 교수의 수가 모두 50명 남짓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고 엘리트 몇명만이 돈 많은 ‘후원자’의 보조를 받아 학문을 탐구할 수 있었던 듯한 인상을 준다. 역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 꼽히는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같으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덕에 젊어서 꽤 편한 환경을 즐겼다. 그의 대작 ‘산술론’ 초입에 실린 공작에게 헌정하는 글을 읽으면 지금 기준으로 낯 뜨거운 칭송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런 사실로부터 당시 평민 학자의 위태로운 처지가 어떠한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공작이 죽은 뒤 서른살 가우스는 괴팅겐 대학에 취직하지만 연구 시간의 부족에 대해 평생 불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젊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는 수학자의 환경은 그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풍요롭다. 대단한 수학자가 아닌 나도 박사학위 받고 7년 후에 종신 교수직에 임명됐고 그 후 연구비에 대해 걱정한 일이 별로 없다. 이는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고 연구가 비교적 활발한 평균적인 학자에게 흔하게 주어지는 여건이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대학이 정부로부터 지난 2023년 받은 연구 지원금은 총 600억달러(85조3천억원)였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조정한 금액이 1950년대의 약 30배였다는 추정이다. 지금 내가 일하는 영국은 230억달러(32조7천억원)였다.

현재 트럼프 정부가 대학에 가하는 압력 탓에 이런 자금 조달 모델의 지속성과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잦아지는 분위기다. 정부 지원이 아니더라도 미국 엘리트 대학의 재정은 천문학적인 등록금도 요구되고(요새 많은 엘리트 대학은 1년 등록금이 8천만원 이상이다), 사회 부유층에 대한 의존도도 높다. 이런 재정 의존이 낳은 파급 효과는 지난해부터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령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시위에 불만을 가진 기부자들의 압력이 하버드대 총장의 사임에서 큰 구실을 했다. 대학이라고 진리를 강하게 옹호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물론 순진하다. 예로부터 권력·부와의 이해관계에서 대학들은 여러 복잡한 결정을 내려왔다. 예를 들자면 공산주의자는 교수가 되면 안된다는 결의를 총장을 비롯한 대다수 하버드대 교수들이 표방한 일도 1940년대에는 있었다.

과연 건전한 학문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연구비의 수준이 얼마일까? 수학자인 나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대규모 정밀 실험에 의존하는 과학에 견줘 나의 연구는 아주 적은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로 놀랍게 돈을 절약하는 연구도 가능하다. 작년에 인도 벵갈루루에 있는 천문학 박물관에서 대중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때 우주항공 공학자 출신의 관장이 인도의 우주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하는데 가장 특이한 점은 비용이었다. 인도의 화성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이 약 7400만달러(1051억원)로 할리우드 우주 영화 ‘그래비티’의 제작비보다 적었다고 그는 당당하게 자랑했다.

트럼프 정부의 기괴한 압력이 미국 학계의 비상 사태를 초래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적어도 수학계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지금의 연구비 의존 체제를 다소 재검해 볼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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