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7) 경주 동궁과 월지…빛으로 만든 명상 공간

문정화 기자 2025. 4. 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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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로 통일신라의 대표적 유적지다. 이곳은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곳이었고 왕실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 각종 의례 등이 열렸던 장소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색종이나 유리 조각이 회전하면서 만드는 환상적인 대칭 무늬, 우리는 만화경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한다. 색색의 파편들이 찬란한 불꽃놀이를 하다가 곧바로 꿈결 같은 추상화를 그려낸다. 수백 번을 돌려도 한 장면도 똑같은 것이 없는 변화무쌍한 조화에 우리는 넋을 잃곤 했다. 무미건조한 일상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은 순간이나, 모든 것이 시들하고 의욕이 사라질 때, 우리는 문득 만화경을 돌리며 환호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만화경 같은 황홀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다. 달빛이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밤 이곳을 걸어보라. 혼자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동궁과 월지는 만화경이고,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젊은 남녀는 색종이와 같다. 달빛이 동궁과 월지라는 만화경을 돌리면 그들은 맑고 순수한 백련과 홍련으로 피었다가 금빛 날개를 반짝이며 몽환의 세계로 날아오르는 나비가 된다. 그대들 또한 다른 사람의 눈엔 독특한 빛깔의 꽃과 나비로 보일 것이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이 빛으로 조각한 환상적인 작품과 같다. 이곳에서는 빛을 보는 것이 아니고 느끼게 된다. 동궁과 월지는 감각의 건축물이고 빛으로 만든 명상 공간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제임스 터렐의 작품처럼 모든 시각적 경계는 제거되고 깊이와 형태도 무너진다. 동궁과 월지에서 방향 감각도 잃고 끝없이 펼쳐지는 빛의 향연에 취해 빛이 끄는 대로 걸어보라. 세속의 번뇌는 어느덧 사라지고 전혀 낯선 나와 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동궁과 월지(경북 경주시 인왕동 517 일대, 사적 제18호)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로 통일신라의 대표적 유적지다. 이곳은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곳이었고 왕실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 각종 의례 등이 열렸던 장소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월지, 곡선과 직선의 미학
동궁의 동쪽에 있는 인공 연못 월지(안압지)는 고려, 조선을 거치며 폐허가 되었고 갈대가 무성해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날아들어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월지'란 명칭은 반월성(半月城, 경주 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해전(臨海殿)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여 2011년 7월부터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정식 명칭을 바꾸었다. 월지에는 가장자리가 곡선과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못의 섬은 한 곳에서는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없도록 곡선을 교묘하게 처리하여 단조로움이 주는 지루함을 극복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이 3만 점에 달한다. 호수 안쪽의 진흙이 유물이 썩거나 훼손되지 않게 보존해 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 건축물에 대한 정보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수많은 건물 자재와 장식들이 나왔으며, 이런저런 고대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이두로 쓰여 있는 목간도 다수 출토되었다. 가령 '문호목간(門號)'이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출퇴근 카드이다. 왕궁의 궁문별로 배치한 경비 인원을 목간에 기록한 다음, 그날그날 근무자의 실재 여부를 감독자가 직접 검사해서 경비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라는 뜻인 '재(在)' 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목간은 나중에 경비원이 봉급으로 받을 곡식을 청구하는 데 썼다. 이런 기록으로 동궁의 구조나 인력 운영 방식까지 알 수 있다. 그 외에 술 게임을 할 때 사용한 일종의 주사위인 주령구(酒令具)라는 이색적인 물건도 있으며, 나무로 된 남근 조각상도 발견되었다.

안압지의 세 전각을 우선 복원했는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한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해 복원한 것 같지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 기와를 활용한 점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프다는 비판도 받는다. 단청도 논란이 되었는데, 현재 칠해져 있는 상록하단 단청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

경주시는 동궁과 월지를 야간 명소로 만들기 위해 연꽃단지를 새롭게 단장하고 있으며 9월에 준공할 예정이다. 주낙영 시장은 "동궁과 월지를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연꽃과 조명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향원익청과 몽환적 풍경
보문호 둘레길을 걷고, 첨성대와 반월성,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거쳐, 홍련과 백련이 연등처럼 초록의 연잎 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연꽃 단지 산책은 초여름 경주 여행의 압권이다. 동궁과 월지는 연꽃 단지와 떼어낼 수 없다. 진흙을 뚫고 올라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자태로 청정하게 피는 연꽃을 두고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했다. '더러운 곳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이란 뜻이다. 불가의 수행자들은 연꽃을 보며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오염물질을 자양분으로 삼아 청량한 산소를 만들고 꽃까지 피우는 연처럼 번뇌와 애욕이 가득한 세상에 물들지 말고, 오염된 세상을 맑게 하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말없이 걸어보라.

연꽃의 향기는 은은하여 멀리까지 퍼져도 오히려 맑고 그윽하다는 향원익청(香遠益淸)을 되새기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날 저물어 동궁과 월지의 수많은 조명 등에 불이 들어오면 그 몽환의 풍경에 잠겨보라. 경주에서 낮에는 천년의 바람이 전해주는 옛 자취를 살펴보고, 밤에는 동궁과 월지에서 은은하면서도 황홀한 빛의 세례를 받으며 내일을 꿈꾸며 구상해 보자. 한 가지는 명심하자. 동궁과 월지는 빈손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빛을 만지며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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