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이혜영, 늙은 킬러를 생동하게 만든 존재의 힘 [인터뷰]

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2025. 4. 3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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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이혜영 / 사진=NEW, 수필름

이혜영은 늘 시대의 벽을 정면으로 돌파해 온 배우다. 1980년대 데뷔 이후 무대와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여성 캐릭터의 지평을 넓혀온 그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전례 없는 도전을 택했다. 영화 '파과'에서다. '파과'에서 그가 연기한 조각은 60대 여성 킬러다. 설정만 보면 생경하고 낯설다. 그러나 그 인물에 이혜영이라는 이름을 얹는 순간, 낯섦은 곧 당위가 된다. 이혜영이기에 가능한 인물, 그래서 반드시 눈으로 확인해야 할 영화다.

"이렇게 오래 연기하고도 이런 기회를 잡다니 싶었어요. 저도 늘 이런 정도의 작품을 만나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되게 특별했죠."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이혜영은 조각이라는 인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 이 정도로 할머니는 아닌데?"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그 이름과 수수께끼 같은 힘에 마음이 끌렸다. 소설과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는 도전과 안정을 고민했고, 결국 도전을 택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 할머니 나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왜 나를 생각했지? 나 이 정도 할머니는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조각이라는 이름이 너무 멋있더라고요. 또 인물에 담긴 수수께끼 같은 힘이 있었어요. 저는 그 힘이 부러웠고, 또 이 할머니가 되게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요."

이혜영 / 사진=NEW, 수필름

'파과'는 전설적인 여성 킬러와 그를 쫓는 젊은 킬러의 대결을 그린다. 조각은 신성방역이라는 조직에서 40년간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제거해 온 레전드 킬러다. 하지만 그는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고, 신체의 노화뿐 아니라 감정에도 변화가 생긴다. 원칙대로라면 제거해야 했을 사람을 살리고, 지켜야 할 것이 생기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뒤흔드는 결투까지 한다.

이혜영은 이 조각을 목숨 걸고 연기했다.

"영화 찍는 첫날, 이태원 클럽에서 구덩이에 처박히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그런데 스케줄 때문에 촬영을 강행했죠. 그러다 무리해서 하나가 더 나가고, 또 하나가 나가서 총 3대가 나갔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구르고 뛰었어요. 이러다 배우 못하는 거 아닌가, 공포가 밀려왔죠. 그런데 그런 상태니까 더 목숨 걸게 되더라고요."

조각은 후배들 사이에선 "대모님"이라 불릴 정도로 살아 있는 전설이지만, 나이는 피할 수 없다. 늙고, 병들고, 느려진다. 신입 킬러 투우(김성철)가 조직에 합류하고, 조각은 어느새 쓸모를 의심받는다. 현장에선 부상을 숨기고, 감정에선 변화를 억누르며 자신을 지탱하지만, 더 이상 예전 같지는 않다.

"몸의 노쇠함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나왔어요. 허리와 등이 저절로 굽고, 어깨도 내려앉죠. 근데 우리 무술 감독님이 본래 배우 하정우 전문 스턴트였어요. 무술 감독님이 조각은 성별을 뛰어넘는 존재로 서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거기에 감정을 유지하면서 기술을 발휘해야 했고, 그걸 어느 상황에서도 발휘해야 했어요."

이혜영 / 사진=NEW, 수필름

마지막 결투 장면을 찍고는 그냥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는 "이거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하는 막막함이 몰려왔다고 했다. 그만큼 깊이 들어갔고 격렬하게 껴안은 작품이었다.

"쓸모라는 단어보다 저한테 더 강하게 오는 건 '쓸모없다'예요. 이 영화에서 하나도 쓸모없는 애(조각)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그렇게 삶을 버텨냈잖아요. 저도 그 감정을 안고 촬영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촬영이 끝이더라고요. 그래서 '왜 끝나는 거야? 끝나지 마. 뭔가를 보상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고,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면 쓸모 있는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 경력 40년이 넘는 베테랑이지만 이혜영은 '파과' 현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통제를 많이 받았다. 지금껏 임권택 감독조차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했지만, '파과'의 민규동 감독은 달랐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지시한 감독님은 처음이었어요. 임권택 감독님도 안 그랬거든요. 감독님들은 늘 제 의견을 물었어요. 그래서 전 언제나 제 느낌으로 연기를 해왔어요. 아무리 상상하고 가도 현장에 가면 달라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상상하지 않고 갔죠. 그게 지금까지는 통했어요. 즉흥적이고 감각적으로 하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걸 만드는 거요. 저도, 함께한 감독님들도 그걸 즐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민 감독은 그게 안 통해요. 이번 영화하고나서 깨달았어요. 남 신경안쓰고 저한테만 몰두한다는 게 남들한테는 안 좋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걸요."

이혜영 / 사진=NEW, 수필름

이혜영은 '파과'에서 김성철과의 호흡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전했다. 그는 조각과 투우의 관계를 김성철이 만들어냈다고 했다. 그는 "조각과의 관계를 성철이가 만들어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말을 이었다.

"너무 어린 상대가 나한테 막 저돌적으로 들어올 때 압도당하면서 때려줄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이건 뭐지?' 그런 감정이 들어요. 그런데 얘는 그걸 하나하나 다 끝까지 끌고 가더라고요. 그 힘이 성철이한테 있었어요. 조각이 섹스어필까지 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건 전적으로 성철이 덕분이죠."

이혜영은 영화 개봉과 함께 곧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만난다. '헤다 가블러'다. 13년 전에도 이혜영은 이 작품에서 헤다 역을 맡았다. 그는 "연극은 끝나는 날까지 완벽하지 않다. 청순하면서도 노련함이 다 요구된다. 그래서 무대를 더 좋아한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무려 40년 넘게 연기해 온 그에게 비결을 묻자 이혜영은 "무지함"이라 답했다.

"다들 아는 걸 저만 몰라요. 저 혼자 상상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욕하고 그래요. 그런 면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가 된 게 아닐까 싶어요. 나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어요. 어려서부터 '난 배우가 될 사람인데 이걸 왜 시켜요' 그랬죠. 배우도, 감독도 신처럼 생각했어요."

이혜영은 그렇게 자신의 무지와 상상력으로 조각이 됐다. 그리고 그 조각은, 늙고 낡고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존재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 있는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영화 '파과'는 결국 이혜영이란 배우의 존재감으로 완성된다. 나이도, 성별도, 장르도 넘어서 관객에게 깊이 꽂히는 그만의 한방. 이혜영이 향하는 무대, 프레임, 그리고 그 다음 도전이 어떤 것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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