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상식과 순진한 공론에 작별을 고하며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헌법재판관은 퇴임 일주일 전부터는 업무를 보지 않는 관행이 있다고 들었다. 짐작건대 단순한 관행은 아닐 터이며, 근무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영역일 것이다. 이른바 ‘말년 병장’도 제대 전에 휴가를 몰아 쓰는 방식으로 군대를 떠날 준비를 한다. 일반 기업 등의 민간 조직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결정이 늦춰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불만을 표했고, 심지어 ‘그래도 월급은 또박또박 받겠지’라며 비아냥댔다. 사람들은 늘 결과를 받고 나서야 그 전에 자신이 가졌던 의구심과 불만의 비합리성을 깨닫는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에는 제각각의 기준이 필요하지만, 또 어떤 일은 너무나 중하다 보니,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거나, 끝이 안 좋을 것 같으면 모든 게 안 좋은 것만 같은 심리 상태에 빠진다.
문형배·이미선 헌법재판관의 퇴임일은 4월18일이다. 이들은 퇴임 2주 전인 4월4일에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이라는 또 한 번의 역사적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은 퇴임 전 휴식을 누리지 못한 채 열심히 일해야 했다. 탄핵 기각 결정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에 돌아온 한덕수가 대행을 넘어 대통령 노릇을 해먹어야겠다며 희대의 몽니를 부린 후과다. 그는 자신의 탄핵 소추 사유였던 국회 추천 몫 헌재 재판관 임명 거부 문제를 대행 복귀 이후로도 한동안 해결하지 않았다. 권한대행의 본체인 윤석열에 대한 파면 결정이 나오고 나서야 마은혁 재판관에 대한 임명장을 썼다.
그러나 본체의 파면을 그 행정부에 대한 헌법적 불신임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대행체의 본체화’를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던 듯하다. 마은혁 재판관의 임명장 아래에 희한한 ‘쪽지’를 밀어 넣었는데, 그 안에는 대통령 몫의 신임 헌법재판관 2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그 가운데 하나는 현직 법제처장이자 계엄 후 대통령 안가에서 회동했다는 4인방에 속한 인물로서 내란 피의자가 된 이완규이다. 계엄 당일 부총리 최상목이 받았던 것은 내란의 물적 토대를 갖추기 위한 쪽지였고, 이후 한덕수가 내민 것은 시민과 국회와 헌법에 의한 내란 저지를 뚫고, 은근하고도 강력한 내란 ‘지속’의 의지를 담은 쪽지였던 셈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연속된 ‘쪽지 내란’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헌법재판소는 한덕수가 밀어 넣은 쪽지를 절반쯤 찢어 되돌려줬다. 신임 마은혁 재판관이 주심이 되어서 내린, 한덕수의 지명 효력을 중지시키는 9인 전원일치의 가처분 인용 결정이다. 4월16일.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이 퇴임하기 이틀 전이었고,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11주기였다. 본안 결정이 나와야 한덕수의 ‘쪽지 내란’에 대한 우리 헌법의 최종적 판단이 내려지겠지만, 헌법과 법률 조문이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고 남겨둔 빈 구석을 쪽지로 메우는 이들의 기상천외한 내란이 과연 언제쯤이나 종식될 수 있을까 싶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천부인권’ 아니라 ‘판부인권’ 따르나
이런 염려는 더 이상 과민증이나 ‘음모론’의 영역이 아니다. 올림픽 100m 달리기도 아닌데 초시계와 계산기를 쥐고 윤석열 석방을 주도했던 판사 지귀연과 검찰총장 심우정의 짝짜꿍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내란 우두머리 재판과 그에 대한 공소 유지 그리고 후속 수사가 이들 손에 맡겨져 있다. 1심 재판의 진행 경과를 보면, 판사 지귀연이 중시하는 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인권(天賦人權)’이 아니라 오로지 윤석열과 그의 동조 세력에게만 주어진 ‘판부인권(判賦人權)’임에 분명하다.
판사 지귀연이 법정을 비공개로 하고 피고인 동선도 은밀하게 짜주다 보니 결국 희미한 전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피고인 윤석열의 눈도 못 마주친 채 소심하게 파워포인트 화면을 읽더라는 검사들은 무려 93분이나 혼자 지껄인 피고인 윤석열을 총장 선배이자 상왕쯤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형사소송에서 삼각구도를 이뤄야 할 피고인과 검사와 판사가 삼각형의 각 꼭짓점이 아닌 일직선을 이루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현상을 두고, 내란 심판에 아무런 의지를 느낄 수 없는 ‘법조 카르텔’이라 부르는 게 과연 지나친 정치 수사학일까?
이뿐만이 아니다. 내란에 가담한 부대장과 지휘관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징계 혹은 처벌도 미진한 채 군 인사가 이뤄지려 하고 있고, 국정원 등의 주요 권력기관에도 마찬가지 작업이 진행되어왔다. 파면된 윤석열 정부가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아니 실은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벌이는 광란의 파티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이나 총리를 맡은 한덕수가 또 두 번이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벌인, 그리고 그의 대행이었던 최상목 부총리와 내란 동조 혐의가 짙은 각부 장관들이 벌이고 있는 각종 고위직 공무원 및 공공기관장 인사 파티는 곳간 열쇠를 넘겨주기 전에 최대한 알곡을 빼먹겠다는 뻔뻔스러운 심사라는 표현 외에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시쳇말로 ‘알박기’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권력의 부스러기를 나눠먹는 데 실로 전심전력이어서기도 하지만, 곳곳에 심어둔 ‘자기 사람들’이 조만간 다가올지도 모를 행정 권력의 상실 이후로도 권토중래의 산실로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현대 미국 정치의 반민주적 한계를 지목한 저서를 통해 밝힌 바 있는 ‘소수의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폭정을 지속하기 위한 간계를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제도적 참호를 구축하고 그 주변에 철조망과 지뢰를 잔뜩 깔아두려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후반을 장식했던 전쟁 양상이 정확히 그랬듯,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항복하지 않는 게 목적이다. 현실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기 어려울 싸움을 기도하는 셈인데, 그저 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상대의 진전을 가로막는 지지부진한 전투를 벌이는 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헌정의 교란과 파괴, 제도에 대한 신뢰를 붕괴시키는 후과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들이 그렇게까지 비합리적이고 그럴 정도로 악독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믿어서라기보다는 현재의 제도가 그들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아서였다. 사실 1987년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요소와 자유주의적 요소가 결합된 이 질서는 그들이 그토록 목 놓아 외치는 ‘자유민주주의’에 부합하며, 이건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유리한 제도이다. 그들이 자칭하는 대로 소위 ‘보수’라면 그렇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제도를 유린하며 악용했고, 심지어 전혀 자유민주적 방식이라 할 수 없을 군령체제 선포를 통해 이 제도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들이 정치적 보수이기는커녕 기껏해야 ‘극우’이며, 심지어 헌정 질서 바깥으로 나간 극단주의 반체제 세력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표이다.
따라서 이들을 더 이상 합리의 시각에서 존중할 수 없다. 여기서 ‘합리’는 지적 역량으로서의 이성적 태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당대 이성의 표현체인 ‘제도에 부합하려 함’을 의미한다. 지금의 이들은 제도를 교란하기 위한 ‘도구적 이성’, 즉 잔머리를 굴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게 공화정을 파괴한 대가로 자신의 알량한 권력과 생존을 도모하려 한다. 이들에 대한 처분이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합리의 틀 안에서 처우하고 교섭하는 게 아니라, 기존 합리성(현행 제도)의 ‘힘’을 최대한 발현하여 일단 이들의 맹동을 제압하고, 새로운 합리성(즉 제도의 개선)을 통해 이들의 준동을 효과적으로 선제해야 한다.
일련의 헌재 결정과 다가오는 선거는 기존 합리성의 영역이며, 선거 이후 행정부와 입법부가 법률과 개헌을 통해 해나가야 할 작업들은 새로운 합리성의 영역이다. 이 두 영역 안에서 이들에게 허용될 자리는 없다. 국무위원, 국회의원, 검사, 판사 등 기존 제도가 이들에게 합법·합헌적으로 보장해준 자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미디어 제도와 그것의 운용 및 개선에 관련된 이슈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파면 일보 직전까지 갔던 방송통신위원장 이진숙은 공석이 된 EBS 사장에 대한 임명 시도를 했다가 이 또한 법원의 가처분 인용 결정에 의해 일단 가로막혔다. 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거쳐 방통위가 지난 총선 전후로 내린 법정 제재에 대해 법원은 취소 처분을 했다. 그동안 법원은 일련의 가처분 인용을 통해 방심위 결정의 부당성을 인정한 바 있는데, 최근의 본안 판단은 이들의 위법성에 못을 박은 셈이다.
서부지법 폭동 옹호자가 선거방송 심의?
최근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이뤄진 방송 심의 자체가 내용을 넘어 절차적으로 무효하다고 보았다는 데 있고, 그 근원은 2인 체제의 방통위가 내린 온갖 결정의 위법성이다. 따라서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심의 결과, 그리고 그에 연관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 결정, 이에 강제력을 부여하려 했던 방송통신위원회의 결정 전반이 형식적으로든 실체적으로든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다가오는 대선 관련 방송의 심의를 담당할 선거방송위원회를 구성했다. 모든 결정이 위법할 수밖에 없었던 방통위가 연임시킨 방심위원장 류희림이 구성한 위원회이다. 요컨대 방통위가 위법적 의결을 통해 임명한 류희림과 몇 명의 방송통신심의위원, 그리하여 애초에 위법 소지를 안고 있는 방심위가 또 구성하기로 의결한 선거방송심의위원회라면, 대선 국면에서 어떤 심의 결정이 이뤄지건 원천 무효가 될 가능성을 안고 출범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제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임명권자의 의지를 대행하여 또 어떤 무리한 결정을 내리려 할까? 이를 사법적 절차를 통해 복구하려면 다시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더 투입되어야 하는 걸까? 이 재판들을 위해 방통위는 이미 상당한 법률 비용을 썼고, 패소자인 방통위가 소송비용을 떠안아야 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이 모든 비용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지불된다. 로스쿨이 배출한 수많은 변호사들의 생계를 국가가 세금으로 보조하는 형국인 이 비합리적 폭정은 대체 어떻게 원상복구할 수 있는 것일까?
상황이 이러함에도 국민의힘은 선거방송심의위원으로 임명된 1인을 콕 집어 “종편 재승인 점수 조작 혐의로 재판 과정에 있는 사람이 선거방송 심의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라며 임명 철회를 촉구했다. 애초에 표적수사에 이은 기소 자체가 감사원과 검찰을 동원한 전형적인 정적 제거 공작 일환이었다는 강력한 의구심이 있다는 점, 나아가 종편 재승인 심사와 선거방송 심의가 무슨 논리적이고 실천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의문이라는 점은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정작 자신들이 추천한 선거방송심의위원은 서울서부지법 폭동을 옹호한 인물이다. 자신들의 추천으로 구성되었던 기존 선거방송심의위원들과 방송통신심의위원들이 내린 법정 제재 결정은 하나같이 위법 판결을 받았다. 감사원과 검찰과 방통위와 방심위와 기존 선거방송심의위가 보였던 정치 편향, 그리고 스스로 추천하여 임명된 인사의 반체제성은 어디로 간 건가? 내란 혐의 피의자인 이완규가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된 것을 두고 국민의힘이 무슨 말을 했던가? 고작 3개월 남짓한 임기의 비상임 선거방송심의위원도 아니라 무려 임기 6년의 헌법재판관이다.
헌법이 잘못해서도 아니고 법률이 잘못해서도 아니라, 그걸 악용해 헌법과 법률의 규범성을 무너뜨린 자들의 잘못 때문에, 정작 제도를 신뢰하고 그 제도 안의 행위자들을 애써 존중했던 이들이 심각한 물적·정신적 피해를 입고 있다. 그렇지만 그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선 여전히 현행 헌법과 법률에, 이 제도의 합리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공화정의, 그것의 시민된 이들이 감내해야 할 숙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 프랑스를 배반하여 나치에 협력한 비시(Vichy) 괴뢰정부에 대한 전후 처리를 물타기하려던 이들에게 알베르 카뮈는 그 유명한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 우리에겐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지 않기 위해 어제의 범죄를 엄정히 벌할 뿐 아니라, 오늘도 엄연히 지속되고 있는 범죄를 벌하고 내일의 범죄를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의 형성 그리고 불관용적 운용이 필요하다. 미디어 제도의 운영과 개선에 관련된 기존의 (어쩌면 나조차도 그 일부였을지도 모를) 모든 어설픈 상식과 순진한 공론이 근본에서부터 재검토되어야 할 이유이다.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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