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되고 싶다면... 외나무다리서 만나는 359년 된 '육지의 섬' [요즘 여행]

이한호 2025. 4.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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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무섬마을
편집자주
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 주위를 내성천이 휘감듯 흐르고 있다.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 섬계고택의 대청마루.

지어진 지 300년 된 한옥의 대청마루에 앉아 봄바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에 몸을 맡긴 채 따뜻한 바람을 맞으니 그간 잊었던 여유가 다시금 몸에 스며든다. 1730년대 지어진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 고택에서 묵은 소회다. 시간이 멈춘 듯 정겨운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섬마을. 쉴 새 없이 울려대는 디지털 기기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면, 부산한 봄을 피해 안온한 봄을 맞고 싶다면, 무섬마을을 방문하자.

무섬마을은 태백산맥 학가산(882m) 줄기의 끝자락을 등지고 삼면이 내성천으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이다. 물길이 마을을 감싸듯 돌아 나가 '물돌이 마을'이라고도 한다. 병풍처럼 산이 둘러쳐진 마을에 들어서면 손쉽게 외부와 단절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 한 명 겨우 지날 폭의 외나무다리가 강 건너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 통로였다. 마을에는 ‘ㅁ’자로 격식을 갖춘 기와집과 단촐한 초가가 옹기종기 어우러져 있다. 무섬마을은 2023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태생부터 속세를 등진 마을

무섬마을을 외부와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S'자로 가느다랗게 굽어 있다.
무섬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무섬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무섬마을은 시초부터 속세와 단절되기 위한 곳이었다. 병자호란으로 황폐화된 조국을 보며 가슴을 치며 한탄했던 선비 반남박씨 박수(朴燧·1641~1729)가 1666년 벼슬을 물리치고 내려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후 후손이 신성김씨 김대(金臺)와 혼인하며 반남박씨와 신성김씨의 집성촌으로 성장했다.

가장 융성했을 때는 120여 가구가 마을에 살았지만 1934년 홍수로 내성천이 범람해 마을의 반 이상이 사라졌다. 현재는 40여 채의 주택이 남았다. 이 중 16채가 100년 넘은 고택이다. 다른 30여 채도 해방 이전 지어졌다. 마을 전체가 국가 지정 유산이지만 고택 중 역사적 가치와 보존 형태가 뛰어난 두 채(만죽재, 해우당)는 지난해 12월 국가민속문화유산에 별도 지정됐다. 이 외에도 일곱 채의 고택이 경북 민속문화유산·문화유산자료로 지정돼 있다.

속세와 동떨어진 무섬마을의 상징은 외나무다리다. 1979년 현대식 교량이 생기기 전까지 외부에서 마을로 들어오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지역 주민들은 ‘시집올 때 꽃가마 타고 한 번, 죽어서 상여 타고 한 번 건넌다‘고 노래한다. 외나무다리는 한발 간신히 내디디기에도 좁다. 얇은 다리 위에 서서 발밑으로 흐르는 물을 보면 얕은 수심에도 아찔하다. 게다가 다리는 물을 따라 굽이친다. 덕분에 ‘외부 세상의 때를 벗고 깨끗한 마음으로 건너야 한다’는 격언이 크게 와닿는다. 속세의 번잡함을 내려놓지 않으면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지기 십상이다.

무섬마을 섬계고택 안채에서 바라본 마을의 밤.
무섬마을 섬계고택의 목재와 기자재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외부와 떨어진 무섬마을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려면 마을에서 하루를 오롯이 보내는 게 좋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담긴 용마루와 대들보 아래서 느긋하게 하룻밤을 보내야 평화로운 마을의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무섬마을에는 여러 채의 고택이 숙박업을 하고 있다. 시간을 돌려 조선시대 자연에 묻힌 선비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룻밤 묵어가는 객이지만 금세 마을의 시간에 적응한다. 다소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지면 마을은 조용해진다. 고택의 창호를 닫고 군불을 땐 바닥에 앉으면 새삼 도시의 밤이 얼마나 소란했는지 체감할 수 있다. 한밤 도로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차량 소음이나 취객의 고성은 들리지 않는다. 평안한 밤이다. 아침도 평온하게 시작된다. 따뜻한 햇살과 밥 짓는 소리에 살며시 눈이 떠지고 고양이와 새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맞바람이 통하도록 문을 열고 아침을 맞으니 자연이 선사하는 시간 앞에 경건해진다.


359년 된 만죽재부터 까치구멍집까지

무섬마을의 입향 종택인 만죽재 사랑마루 아래 땔감으로 쓸 장작이 쌓여 있다.
만죽재와 함께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해우당의 모습.

40여 채의 고택이 있는 무섬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수백 년 된 고택부터 경북 지역 특유의 까치구멍집(건물 한 채에 안방, 사랑방 등이 있는 폐쇄형 초가) 등 다양한 형태의 가옥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작은 박수가 터를 잡았던 마을의 입향 종택 만죽재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1666년에 지어졌으니 햇수로 360년이 됐다. 입향 시조부터 13대가 계속 거주하고 있다. 오래됐지만 정갈한 기와와 관리가 잘된 마루와 대들보, 창호 등이 고택의 위엄을 드러낸다.

만죽재의 대문을 기준으로 마을의 남동쪽 일대는 현대식 건물이 거의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역 특유의 '까치구멍집' 모습과 변천사를 잘 간직하고 있어 경북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김규진, 김정규, 박덕우, 박천립 가옥도 일대에 있다. 1800년대 건립돼 역시 지역유산으로 지정된 전통 ‘ㅁ’자 기와집 김덕진, 김위진 가옥도 이 구역에 있다. 고택 주변으로 낮은 담장이 이어지고, 길가에 핀 꽃과 풀이 정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에 수백 년 된 고택과 초가들이 모여 있다.

만죽재 건너편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마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섬계고택(1730년대 건립 추정)이 있다. 마을의 유일한 식당, 편의점, 자판기, 자전거대여소, 공중화장실 등 편의시설 대부분이 마을 북서쪽에 있다. 만죽재와 함께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해우당, 지역유산인 김뢰진 가옥도 있다. 1830년 신성김씨 일가가 지은 해우당도 안채와 사랑채 등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의 평면구성을 잘 갖추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고,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해우당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서천, 영주호, 용혈폭포... 물 구경

영주댐 인근의 인공폭포 용혈폭포에서 세찬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영주호와 가운데 섬의 용마루공원 모습.
무섬마을을 지나 영주호 방면으로 이어지는 내성천의 모습.

무섬마을 외부도 둘러볼 만하다. 마을에서 3km 동쪽으로는 영주호와 용혈폭포가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무섬마을과 다르게 각각 2016년, 2018년에 조성된 신생 관광지다. 비록 인공시설이지만 경북 지역의 장엄한 산세와 함께 물이 흐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용혈폭포는 60m 높이의 절벽 꼭대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20m 정도의 높이에서 두 줄기로 갈린다. 초록으로 가득한 산을 배경으로 힘찬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풍경에 감탄이 나온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급수시설이 내장된 틈과 물의 흐름을 유도하기 위해 깎은 바위 모양이 눈에 들어오지만 지상의 조망대에서는 알아채기 어렵다.

용혈폭포로부터 500m 거리에 영주댐이 있고, 여기서부터 영주호다. 4대강 사업의 마지막 단계로 기획된, 10년이 채 안 된 호수다. 태백산맥 자락에 위치한 호수답게 시야 뒤편이 첩첩산중이다. 영주호 내 가장 큰 섬에는 용마루공원이 있다. 공원으로 가면 호수 한가운데서 주위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지난달 6년 만에 낚시금지구역에서 해제돼 내륙 낚시를 즐기는 시민들이 다시금 몰려들고 있다는 소문이다.

영주 시내에서 무섬마을로 이어지는 서천 자전거도로변에 버드나무가 자라 있다.
서천의 모래사장과 산의 숲 덕에 지나는 풍경이 아름답다.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소백산에서부터 흘러 무섬마을을 휘감는 내성천과 합류하는 서천을 따라 자전거길이 조성돼 있다. 영주 시내 자전거공원, 서천생활체육공원 인근 천변주차장, 한정공원 인근 한정교·문정교에 설치된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다. 하루(24시간) 이용 요금은 1,000원이다. 무섬마을과 용혈폭포, 소수서원 인근 선비촌소형주차장에도 대여소가 있다. 시내에서 빌려 타고 목적지에서 반납해도 된다.

서천은 내성천과 마찬가지로 넓은 모래사장과 버드나무 군락이 아름답다. 연화산(266.2m)과 달봉산(192.7m) 사이를 지나 녹음이 우거진다. 산의 숲과 강가의 버드나무 덕에 가는 길이 선선하다. 힘이 부치면 버드나무 쉼터 등에서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영주 시내 최남단 자전거 대여소인 문정동 한정공원 인근 대여소에서 출발한다면 무섬마을까지 1시간이면 도착한다. 12km 남짓의 경로다. 다만 본래 전 구간 자전거 도로가 닦여 있지만 2월부터 월호교~성잠교 사이 2km 구간이 개보수에 들어가 공사가 끝날 때까지 차도로 우회해야 한다. 흐르는 물길 따라 완만한 내리막이었던 자전거도로와 달리 구릉을 올라야 하고 안전 우려가 있어 보수공사 이후에 이용하기를 권한다.

영주=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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