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서 젊은이가 어르신을 살렸다는 '따뜻하고 무서운 얘기'
[남형도의 못마침표] 청년 농부 목쉬도록 소리쳐, 청각장애인과 어르신 살려…
'영웅'에 기대지 않아도 응당 살아야 할, 취약계층 대피 시스템 부재
[미디어오늘 남형도 머니투데이 기자]
따스한 미담이라고 했다. '영웅'이라 추켜세우기도 했다. 지난달 '괴물 산불'이 경북을 덮쳤을 때, 젊은이가 차마 피하지 못한 취약계층을 극적으로 살린 얘기 말이다.
지난달 25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에 살던 신한용 씨(36)가 들려준 얘기도 그랬다.
마침 바깥에 있었던 한용 씨는, 재가 날아오는 걸 봤다. 산불이 번져 오는 게 심상찮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속도가 너무 빨랐다. 누구도 그 불이 온 마을을 없앨 거라고 상상 못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한용 씨는 마을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가장 젊은 사람이 60대 후반, 거의 다 70~80대 어르신들이었다. “대피하세요”라고 집마다 다니며 외쳤다. 목이 쉬어버릴 정도였다.
바로 뒤까지 산불이 올 정도로 급박했다. 한용 씨가 청각장애가 있는 할머니 집에 갔을 때였다. 할머니가 멀리서 그를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정도로 상황 파악을 못 했다.
일일이 다가가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했다. 그리 어르신들을 직접 대피시켰다. 한용 씨의 활약 덕분에, 불길이 다 휩쓸고 갔어도, 마을에선 죽거나 다친 이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한용 씨가 뒤늦게 털어놓은 말이 이랬다.
“1~2분만 늦었어도 죽을뻔했어요. 그 정도로 위급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죽을지 살지 촌음을 다투는 순간에, 젊은 농부가 어르신들을 구해낸 따뜻한 이야기로 봐야 할까. 물론 평범한 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누군가를 살린다는 건.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런 거다.
이 마을에, 젊은 농부 신한용 씨가 없었다면, 어르신과 장애인들은 대피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됐을까?
모두가 '영웅'이라 부른, 인도네시아인 대게잡이 배 선원 수기안토 씨(31), 레오 씨(24), 비키 씨(24) 얘기도 마찬가지다. 한용 씨가 어르신들을 살린 그날, 이들은 영덕군 축산면 경정3리에서 어르신들 대피를 도왔다.
여기서 7년 넘게 살았던 수기안토 씨는, 귀가 잘 안 들리거나 거동이 불편한 이가 누군지 잘 알았다. 그들에게 거침없이 향했고, 등을 내어주어 업히게 했다. 레오 씨도 집에 고립돼 있던 할머니를 업고 방파제로 피하게 했다. 무서웠다면서도 내 가족을 구하는 심정이었다고 추후 털어놓았다. 이 사례에서도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이 마을에 외국인 젊은이 세 명이 없었다면, 어르신들은 자력으로 대피할 수 있었을까. 혹은 이들이 구하길 주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러한 선의는 우연에 의해 그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에, 따뜻하지만 무서운 거다.
영웅이 없는 마을의 어르신들은 실제 많이 숨졌다. 소방청에 따르면 이번 경북 산불로 인한 사상자가 82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 60세 이상 고령자가 45명으로 비중이 높았다. 사망자도 31명이었는데, 60세 이상 어르신이 29명으로 93%였다.
이는 최근 10년간 통계를 살펴도 다르지 않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자연 재난 사망자 438명 중 60세 이상이 69%(303명)이었다.
이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난 발생 시 어르신들의 대피를 돕기 위한 '재난안전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노인과 장애인 등 재난 취약계층의 대피를 돕는 '대피 도우미' 제도를 마련하고, 대피 장소를 안내하고 숙지하게 하며, 마을 방송 등을 활용한 경보 시스템 구축 등 내용이 담겼다.
경북 안동에 80대 노모가 홀로 산다는 김재민 씨(51)는 산불이 난 직후 급히 달려갔단다. 힘들게 뭐 하러 왔느냐고, 괜찮다고, 애써 웃으며 나무라는 말을 듣고 속상해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재민 씨가 이리 말했다.
“연락도 안 되고 너무 걱정돼 어머니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화를 냈어요. 그러니까 저희랑 같이 살자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고요. 한평생 산 동네인데 어떻게 떠나느냐고 해요. 다들 그런 분들이라고요. 다행히 살았다가 아니라, 사는 것만큼은 언제든 당연한 게 돼야죠. 국가가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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