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61> 고봉 쌀밥, 봄 주꾸미

최원준 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 2025. 4. 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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찹쌀밥처럼 알 차올라 쫀득 고소한 주꾸미, 인간탐욕에 씨 마른다

- 죽순 나는 봄철에 맛있다하여
- ‘죽금어’로 칭한 게 ‘주꾸미’ 돼
- 남해산, 색상 밝아 귀한 대접

- 머리는 숙회로, 다리는 회로
- 샤부샤부와 매운볶음도 인기
- 산란기 뒤 금어기 설정했지만
- 남획으로 매해 개체수 줄어

꽤 오래전 일이다. 지금처럼 주꾸미가 귀하지 않고 흔했던 시절, 봄이면 해안가 식당에서 공짜로 한 접시씩 내어주던 술안주가 ‘주꾸미 먹물 숙회’였다. 지천으로 잡히던 주꾸미를 양푼 냄비에 별 조리 없이 데쳐서 접시에 담아내면 끝.

봄이 제철인 주꾸미로 차린 요리들. 메인 사진에 등장한 주꾸미 숙회는 알이 꽉 찬 머리 부분이 별미로 여겨진다.


다양한 갯것들의 고향, 진해만을 낀 포구에서 생애 처음으로 주꾸미를 맛보았다. 진해 용원 선착장의 어느 선술집, 늙수그레한 뱃사람이 호의로 건넨 주꾸미 먹물 숙회. 온통 먹물을 시커멓게 뒤집어쓴 주꾸미에, 적잖이 당황하며 한 마리 통째로 입에 욱여넣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맛을 보게 된 주꾸미는 그야말로 새로운 미식의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들큼한 먹물의 맛과 향, 살강살강 하면서도 적당히 쫄깃한 식감, 씹으면 씹을수록 살살 올라오는 두족류 특유의 짙은 풍미. 그야말로 가히 맛의 신세계가 펼쳐졌던 것이다.

▮서해안이 주산지인 팔완목 두족류

주꾸미는 문어과 주꾸미속의 두족류(頭足類) 연체동물로, 두족류 중에서도 팔완목(八腕目)의 어족이다. 흔히 머리라고 부르는 몸통과, 다리라고 부르는 8개의 팔이 한데 붙어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문어와 낙지, 주꾸미 등이다.

주꾸미는 팔완목 두족류 중에서도 그 크기가 가장 작다. 생긴 것은 낙지 문어와 비슷하나, 낙지보다는 다리가 짧고 문어보다는 크기가 현저히 작다. 이 때문에 머리는 크고 발은 짧은 모습의 ‘가분수’의 몸매를 가졌다.

제철은 3~4월, 산란은 5월 전후인 4~6월 경이다. 수명은 대략 1년 정도로 부화 후 7~10월에 걸쳐 생육하고 11~3월 중 성체를 이룬다. 주로 수심 10m 내외의 모래밭이나 자갈이 섞인 개펄에서 서식한다.

주꾸미 주산지는 주로 서해안이다. 원래 서남해 전역에서 어획되는 어족이지만, 그중에서도 충청남도 서천과 태안, 보령 등지가 그 생산량이 많고 매년 주꾸미로 축제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전라남도의 신안군, 무안군도 세발낙지와 더불어 주꾸미의 주요 산지들이다.

주꾸미 샤부샤부.


남해안에는 진도 완도 고흥 여수 등지에 주꾸미 어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남해안 경상남도 해안에도 주꾸미 어획량이 적지가 않다. 진해를 시작으로 거제 통영 삼천포 남해 등지의 연안에서도 잘 잡힌다. 특히 삼천포, 남해 연안의 주꾸미는 몸 색이 밝아 귀히 여긴다.

주꾸미의 유래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준어(蹲魚), 속명으로 죽금어(竹今魚)라 기록하고, ‘크기는 4∼5치에 지나지 않고 모양은 문어와 비슷하나 다리가 짧고 몸이 겨우 문어의 반 정도이다’고 썼다. 죽금어는 ‘죽순이 한창 날 때 제철이라 맛있는 어족’이란 뜻이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에는 한자어로 망조어(望潮魚), 우리말로 ‘�근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근이는 ‘죽근(竹根)’ 즉 죽순을 뜻하고 있다 하겠다. 이처럼 죽금어, �근이가 음운변화에 따라 주꾸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주꾸미는 주로 피뿔고둥 등 큰 고둥류의 껍데기를 어구로 활용하여 어획한다. 큰 고둥껍데기를 일정 간격으로 긴 줄에 묶어 연해의 바닥에 가라앉혀 놓고, 그 고둥껍데기에 들어간 주꾸미를 잡아내는 방식이다. 이 고둥껍데기를 ‘주꾸미 소라방’ ‘주꾸미 소호’ ‘주꾸미 단지’ 등으로 부르며, 이 어구를 활용한 어업을 ‘소라방 어업’ ‘소호 어업’이라 부른다.

▮봄에 가장 맛있는 식재료

주꾸미 불고기.


이렇게 잡은 주꾸미는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해서 먹는데, 특히 제철 봄에는 알이 꽉 찬 알 주꾸미가 가장 인기가 많다. 주꾸미는 포란기(3~4월)가 되면 머리에 알이 꽉 찬다. 그것을 끓는 물에 데쳐서 먹으면 마치 찹쌀밥을 먹는 것처럼, 입안 가득 터지는 식감과 함께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맛과 풍미를 맛볼 수가 있다.

어민들은 주꾸미 머리에 가득 찬 알을, 흰 사발에 쌀밥 한 고봉 가득 담아놓은 모습이라고 ‘주꾸미 쌀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봄 주꾸미는 살맛보다 알 맛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 년 중 봄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로 꼽힌다.

주꾸미 머리는 숙회로 먹으면 좋다. 알과 함께 터지는 들큼하면서도 고소한 먹물의 풍미가 금상첨화이기 때문이다. 잘 익은 먹통의 진한 감칠맛과 쫀득쫀득한 알이 찹쌀밥처럼 씹히는데 그 흔쾌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주꾸미 다리는 회로 먹으면 그 식감이 예사롭지 않다. 낙지 다리보다 식감이 더 좋아 오돌오돌 쫄깃쫄깃한데 소금 참기름장에 찍으면 고소한 맛이 더하고, 회 초장에 찍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봄맛을 일깨운다.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는 부드러운 식감의 다리 숙회가 좋다. 부드러우면서도 오돌토돌한 식감에다 다디단 감칠맛이 참 잘 어울린다.

서해안에서는 샤부샤부로도 즐겨 먹는데 다리는 살짝 익혀 부드럽게 먹고 몸통을 차지게 잘 익혀 먹통과 알을 쫀득하게 먹는다. 남은 국물로는 칼국수와 수제비로 끓여 먹고, 죽이나 볶음밥으로도 조리해 먹는다. 마치 코스요리처럼 알차게 먹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제철에는 전라도 홍어, 경상도 문어처럼 제사상에 올리기도 했다고.

매운 양념의 주꾸미볶음도 요즘 MZ세대나 직장인, 여성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다. 화닥화닥거릴 정도의 강한 매운맛에 몸과 마음을 매콤하게 자극하는 재미가 아주 괜찮은 음식이다. 삼겹살과 함께 맵게 볶아먹는 ‘쭈삼구이’도 새로운 대표 메뉴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전국적으로 주꾸미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 곳도 많은데, 서울의 용두동, 성내동과 인천의 만석동, 부산의 중앙동 등지가 그곳으로, 화끈한 맛의 주꾸미구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노포가 오래도록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에서는 매운 양념에 버무린 주꾸미를 연탄 석쇠에 구워 먹는 ‘주꾸미 연탄석쇠구이’를 즐겨 먹기도 한다.

주꾸미는 지역마다 여러 가지 독특한 음식으로 요리해 왔다. 그 이름도 ‘쭈꾸미’ ‘주깨미’ ‘죽거미’ ‘쭉지미’ 등 달리 불릴 정도로 서민들에게 널리 사랑받기도 했다. 한 마디로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지져 먹고, 회로 먹고 데쳐 먹고 볶아먹는, 어떻게 먹어도 개성 있는 맛깔이 제대로 발현되는 식재료가 주꾸미겠다.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주꾸미가 봄에 가장 맛있다는 말이다. 그러나저러나 봄 주꾸미 개체수가 해가 갈수록 크게 줄어들고 있다. 연안 바다의 환경 변화 영향도 있겠으나, 산란기 주꾸미의 남획 또한 그 원인이기도 하다. 특히 전문가 그룹은 주꾸미의 산란철과 금어기 설정과의 괴리를 문제점으로 꼽기도 한다.

주꾸미의 제철로 보는 3~4월과 금어기의 5월 11일~8월이 그것인데, 현재 상황이라면 제철인 3~4월에 주꾸미가 이미 알을 배고 있는 상태로 어획, 소비된다는 것이다. 해서 4~5월 산란기 전에 금어기를 설정해야만 주꾸미 자원 보호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얀 쌀밥 같은 알을 꽉꽉 채운 주꾸미의 매력적인 맛에, 이미 길든 인간들의 식탐이 이를 쉬 허락할는지가 문제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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