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년 농부다] 농부·제빵사·강사…하루하루가 인생정원 가꾸기

이설화 2025. 4. 29. 00:0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대 평창 귀향 부모님 도우며 농사 첫발
어머니 영향 고객 목소리 최우선 반영
직접 키운 메밀로 만든 건강‘ 메밀빵’
재기발랄 아이디어 맞춤 ‘케이크’ 인기
워킹맘·베이커리 운영·제빵 강의
임 대표 다양한 활동의 중심축 ‘농업’
“농업 노동의 가치 온전히 존중받길”
임윤회 단향토끼 대표

엄마는 딸이 그림과 가까운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의 이름에 그림 ‘회(繪)’자가 있는 것도 그래서다. 엄마의 바람대로 임윤회(38) 단향토끼 대표는 예고를 졸업하고 미대 조소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중단하고 이내 평창에 돌아왔다. 농업대학 특용작물과를 선택했고, 부모님을 도와 산양삼을 팔았다. ‘내 사업’을 시작한 건 5년 여 전이다. 시작은 삼 추출물을 넣은 초콜릿이었지만, 메밀빵과 케이크가 주력이 됐다. 윤회 씨는 이제 오븐 위, 케이크 보드 위에 작품을 올린다. 그는 “행복한 날을 기념하는 게 디저트”라며 “손님들이 좋아해주는 모습이 힘이 된다”고 했다. 지난 25일 평창 봉평면의 베이커리에서 임 씨를 만났다.

임 대표가 만든 케이크

■ 환우들이 찾는 메밀빵

윤회 씨는 메밀로 빵을 만든다. 메밀을 선택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자란 봉평면은 대표적인 메밀 주산지 중 하나다. 인지도가 높아 작물과 효능을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윤회 씨는 “건강에도 좋고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게 메밀이었다”며 “밀 농사도 생각했지만, 메밀이 재배하기도 훨씬 수월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는 직접 농사지은 메밀로 빵을 만든다.

처음엔 부모님이 농사짓던 산양삼 추출물을 넣은 초콜릿을 팔려고 했다. 손님들이 더 많이 찾은 건 부가적으로 만들었던 메밀발효빵이었다. 밀가루, 설탕, 버터를 쓰지 않은 발효빵은 건강 회복을 이유로 평창을 찾은 이들의 요구에 딱 맞았다. 윤회 씨는 “메밀빵의 주 고객층은 암, 당뇨 등 질환을 가진 환우들”이라며 “요양하러 평창에 왔다가 빵을 먹어본 분들이 지인들에게 입소문을 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너개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제빵사이자, 농사를 짓는 농부이고, 학교에서 제빵을 가르치는 강사다. 초등학교 5학년생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윤회 씨의 하루는 자꾸 앞당겨졌다. 새벽 2시에 작업실에 출근해 빵 반죽을 시작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 등교를 마치면 밭으로 향한다. 일주일에 네 번은 제빵 강사로 반나절을 보낸다.

그런데도 그는 농사를 놓지 않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가 잠시 생각을 놓을 수 있는 곳이 밭이어서다. 윤회 씨는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는데, 밭에 가면 멍하니 있어도 되니 좋다”며 “사업의 중심은 농업”이라고 했다.

단향토끼 메밀빵

■ 잣 모르던 ‘서울 촌놈’

평창에서 살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온 동네 사람들이 살림살이를 가득 실은 이삿짐차가 윤회 씨 집 앞에 서는 것을 봤다. 귀농 귀촌 인구가 많지 않은 때였다. 윤회 씨는 “펑펑 울었던” 이삿날을 잊지 못한다. IMF 때문에 온 이사였다.

유년시절은 모든 게 긴장의 연속이었다. 윤회 씨는 한 손은 여동생, 다른 한 손은 남동생을 꼭 잡고 학교에 다녔다. 전교생이 열 명 남짓한 분교였다. 시골 친구들은 솔방울을 통째로 따다가 발로 뭉개 잣을 까먹고, 애기똥풀을 가져다가 매니큐어 놀이를 했다. 하루는 친구가 준 잣을 껍질 째로 아작아작 씹은 적도 있다. 마트에서 파는 노란 잣만 봤지, 그 잣이 솔방울에서 난다는 것을 몰랐던 ‘서울애’였다. 그런 윤회 씨를 두고 “서울 촌놈”이라며 ‘텃세’를 부렸다. 친구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로 다가와 또 눈물이 났다.

30여 년을 평창에서 지낸 윤회 씨도 이제 ‘서울 촌놈’이라는 말을 쓴다. 그에게 서울 촌놈은 농사의 수고로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빵 가격을 깎아달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농산물 가격은 흥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그는 여러 번 봤다. 성실하게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이듬해 보이지 않으면 십중팔구 몸이 아픈 경우였다.

농업 노동의 가치가 온전히 존중받는 게 윤회 씨의 바람이다. 모양에 흠이 있어 제값을 주고 팔지 못하는 ‘파지’도 그렇게 활용하게 됐다. 농민들이 제값을 받지 못해 버려야한다는 사과, 파 등을 가져다가 잼을 만들고, 빵에 넣었다.

■ 닮은 우리, 엄마와 나

윤회 씨에게 엄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엄마는 장롱 같았다”고 회상했다. 진로며 사업이며 계획을 세워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는 그럴 때마다 높은 벽이 된 것처럼 윤회 씨를 튕겨냈다.

사업을 시작하며 선언했다. 엄마의 방식은 따르지 않겠다는 것. 하지만 그는 많은 면에서 엄마와 닮아있다.

산양삼 판매를 돕던 10여년 전의 일이다. 윤회 씨는 “‘이것도 팔아라’, ‘저것도 팔아라’ 하는 엄마 주문에 따라 물건을 1t 탑차에 실었다”며 “삼, 더덕, 도라지 원물부터 약초 50개, 발효액 10개…. 가만히 세어보니 판매하는 물건만 200개였다”고 회상했다. 지나가는 손님들이 ‘도라지 있느냐’고 물으면, 기어코 도라지를 구해 진열대에 올려 놓던 사람이 엄마였다. 그렇게 늘어난 품목에 따라 라벨지며 포장지도 늘었다. 엄마는 침대 옆에 기역(ㄱ)자로 일거리를 쌓아두고 살았다. 잠자기 전까지 일을 놓지 않던 분이었다.

윤회 씨는 눈을 뜨면 작업실로 향한다. 초콜릿 장사를 계획했지만, 빵과 케이크도 만들어 진열대에 올렸다. 단품으로 시작한 빵은 마늘빵, 파운드, 단팥빵 등으로 금세 가짓수가 늘었다. 그는 “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은 여러 개를 주욱 펼쳐놓아야 눈길을 줬다”고 했다.

고객의 요청사항도 모두 접수한다. 계피나 견과류를 빼달라는 요구도 모두 반영하는 식이다. 수용이 빠른 피드백은 케이크 판매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조소과를 선택했던 미대생은 케이크 위에 그림을 그리고 꽃을 피워낸다.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디저트를 만드는 게 윤회 씨의 예술이다. 덕분에 농산물 수확이 끝난 겨울도 윤회 씨에겐 ‘대목’이다. 인근의 스키장에 놀러온 이들은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여행지에서도 케이크를 찾았다.

단향토끼 초콜릿

■ 빵굽는 트럭을 타고

올해 윤회 씨는 힘이 닿는 데까지 달려보고 싶다. 고객 한 명과의 인연이 어떻게 펼쳐질지 몰라 고객의 요구를 “무조건 받는다”. 엄마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내 시간’, ‘내 공간’을 잘 가꾸는 게 목표다. 일과를 모두 마친 저녁, 술 한 잔과 재밌는 영상 한 편으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그다. 최근엔 다큐멘터리 ‘인생정원’을 재밌게 봤다.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재에 집중하며 사는 이야기라는 점이 깊이 다가왔다. 윤회 씨는 “당장 1년, 5년 뒤의 내 모습을 생각하지만, 그러면서 놓치는 순간들이 있지 않느냐”며 “오늘 하루를 사는 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언젠가는 푸드트럭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싶다. 트럭에서 빵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오래 머물면서 글도 쓰고 싶다. 윤회 씨는 “내 시간, 내 공간 속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며 “그러려면 아이가 빨리 커야겠다”고 웃어보였다.

이설화 기자
 

#윤회 #엄마 #농부 #강사 #평창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