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미술관 산책 <21>] 피카소는 예술을 훔쳤는데도 왜 위대한가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파블로 피카소의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예술 창작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자 그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동시대 많은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거침없이 차용하고 융합했다. 그러나 단순한 차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냈기에, 그는 오히려 ‘위대한 예술가’가 됐다.
그 시발점이 된 작품이 바로 유명한 1907년 작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르네상스 이래로 이어져 온 중심 원근법은 모든 것을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폴 세잔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시선이 단일 시점에 고정돼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고, 사물의 외형보다는 그 사물의 기하학적 구조에 따라, 공간을 시각적으로 무게와 균형에 맞춰 배열하는 시도를 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피카소는 이러한 세잔의 공간에 대한 시각과 아프리카 원시 조각의 추상성을 차용해, 인체를 기하학적 단위로 분할하고, 많은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결합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통적인 누드화가 아닌 날카롭고 분리된 신체 모양으로 표현되며, 다섯 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왼쪽 인물은 이집트 벽화에서 본 익숙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있는 두 인물은 아프리카 가면 같은 모습으로 얼굴의 시점이 다면화돼 있다. 이는 이전 누드화의 전통을 전복한 대담한 표현이며, 사실상 입체파의 시발점이다. 피카소는 누군가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는 차용한 요소를 분해하고 재조립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 세계를 만들어냈다.
콜라주를 훔치다
1912년, 피카소는 또 한번 회화의 경계를 넘는다. 그는 신문지·천·유리 등을 화면에 직접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도입한다. 이 기법은 입체파의 논리를 확장한 것이자, 현실 세계의 물질을 회화에 도입함으로써, 예술의 개념 자체를 흔드는 시도였다.

대표작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은 실제 등나무 의자 방석 모양의 유화 질감 위에 인쇄된 패턴과 로프를 붙여 평면 회화의 경계를 허문다. 피카소는 카페 음식과 신문을 묘사한 타원형 캔버스에 기름천 조각(식탁보에 사용되는 방수 천)을 붙여서 입체파 콜라주를 만들었다. 현실의 파편을 회화의 허구적 영역에 삽입하는 이 급진적인 행위를 위해 그는 기발하게 대량생산된 기성품의 시각적 속임수를 선택했다. 그리고 프레임은, 밧줄로 자신의 정물화를 둘러쌌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재치 있게 모조품을 흉내 냈다.
사실 콜라주 기법을 먼저 시도한 사람은 동료인 브라크였다. 그리고 피카소는 같은 해, 브라크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더욱 대담하고 확장된 콜라주를 시도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상호 자극과 실험을 통해 각자의 조형 언어를 확장했다. 프랑스어로 ‘풀칠하다’라는 의미인 콜라주는 단순한 기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이 회화인가’라는 질문, 즉 회화의 정의 자체를 재구성한 행위였다. 피카소는 사물의 외관을 넘어서 그것이 가진 질감과 존재성을 시각 언어로 치환해 냈고, 이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두 거장의 대화: 마티스와 피카소
20세기 현대미술의 두 거장,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는 예술의 언어로 대화한 친구이자 경쟁자였다. 마티스는 피카소보다 열두 살 연상이었다. 그래서 늘 마티스는 피카소보다 일정 기간까지는 선배로서 대중의 시선에서 앞서 나갔다. 마티스는 곡선 중심의 인체 표현, 대담한 색채, 장식적 평면 구성을 통해 전혀 다른 회화 세계를 구축했고, 피카소는 그의 조형 언어에 질투하면서도 끌렸다.
이 중에서도 두 사람이 각각 남긴 작품 ‘삶의 기쁨’은 제목부터 동일하며, 그 유사성과 차이 그리고 상호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905년, 마티스는 야수파의 선두 주자로 나서며 예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 중심에 있었던 작품이 바로 ‘삶의 기쁨’이다. 이 대작에는 형식과 구상, 원근법의 질서가 해체되고, 그 대신 감정과 해방의 색채가 화면을 지배한다. 넓게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에 나체의 인물들이 자유롭게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티스는 “색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색채를 활용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목가적 이상향을 넘어, 감각의 해방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선언이자, 현대 회화가 전통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한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그로부터 40여 년 후인 1946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피카소는 마티스와 자주 교류하던 시기에 또 하나의 ‘삶의 기쁨’을 완성했다. 피카소의 ‘삶의 기쁨’은 전쟁의 폐허를 지나 다시 찾은 평화와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화면에는 고대 그리스·로마신화를 연상케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피리를 부는 남자, 춤추는 여인들. 이들은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마티스처럼 장식적이거나 색채가 파격적인 대신, 간결한 선과 조형으로 구성되며 평온한 인상으로 마무리된다. 두 작품은 모두 자연 속 나체 인물, 춤과 음악, 생의 기쁨이라는 공통된 테마를 다룬다.
그러나 접근 방식은 극명히 다르다. 마티스는 색채와 감정으로, 피카소는 신화와 상징으로 이를 풀어낸다. 마티스가 ‘보이는 감정’ 을 그렸다면, 피카소는 ‘기억과 사유’를 그림에 담았다. 이 시기 피카소 삶의 동반자였던 프랑수아즈 질로는 이 그림을 두고 “피카소가 마티스에게 보내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 이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피카소는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차용했고, 자기만의 언어 방식으로 또 다른 작품을 완성했다. 그래서 피카소의 ‘삶의 기쁨’은 일종의 오마주이자 창의적 변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65세의 피카소와 25세의 질로는 이 작업이 끝난 직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됐고 피카소의 ‘삶의 기쁨’은 또 다른 피카소의 삶의 기쁨의 기록이었다.
피카소는 훔쳤기에 위대하다
피카소는 입체파로 기존 회화를 해체했고, 콜라주로 회화의 물질성을 재정의했으며, 마티스의 조형 언어를 자기화해 새로운 감성 구조를 창조했다. 세잔의 구조, 브라크의 큐비즘, 마티스의 색 면, 아프리카 미술의 원시성까지 흡수하고 자기 언어로 응축했다.
그의 위대함은 ‘훔침’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변형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화했는가에 있다. 그는 차용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융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예술의 본질임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인물이었다. 결국 피카소 예술은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도 아무것도 복제하지 않았던, 창조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훔쳤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훔쳤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예술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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