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지켜야” 굴복 없는 의병항쟁…민족의식 불씨 되다

최현정 2025. 4. 2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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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출신 최도환 의병장 항일 결심
1906년부터 일본군 상대 맹활약
춘천형무소서 단식투쟁 옥중 순국
가평 출신 독립운동가 신숙 선생
독립선언서 교정·인쇄작업 담당
장인 최도환 존경 담아 추도문 작성
“열악한 환경 속 일본 맞선 의병
활약상 재조명·사업 발굴 필요”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11. 최도환 의병장과 독립운동가 신숙 선생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나라를 위한 행동이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고 있다.”

양구 출신의 최도환(崔道煥) 의병장은 보부상의 우두머리로 활동하다 1906년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200여명의 의병들을 거느리며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맹활약, 이후 일본군의 거센 탄압과 함께 신병을 얻으며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몸 바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쇠약해진 몸으로 단식투쟁을 하다 순국했다. 비록 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신념은 애국심과 민족의식의 불씨가 되어 3·1 운동, 임시정부수립 등으로 이어져 해방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의병활동은 3·1운동, 임시정부 활동 등에 비해 오래 전 일이라 그 당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최도환 의병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사위였던 신숙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잘 알려져있지만, 정작 그의 장인이 최도환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군과 끝까지 맞서 싸운 의병부대가 재조명되고, 더욱 기억되길 바란다는 최도환 의병장의 증손자 최영구씨를 최근 강원광복기념관에서 만났다.

▲ 최도환 의병장의 건국훈장증. 최영구씨 제공

■보부상의 우두머리, 의병장이 되다

최도환(崔道煥) 의병장의 신념은 확고했다.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막는 게 곧 나라를 위한 행동이라는 것. 옹기점 보부상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의병항쟁을 준비했다. 1906년 10월 양구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 300여 명의 도민들이 모인 가운데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위정척사 유생들이 초기 의병항쟁을 주도했다면, 후기에 들어서는 최도환 의병장과 같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들이 직접 선봉장으로 나섰다. 이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고통이 날로 커지고, 평민들 사이에서도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가진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도환 의병장 역시 평민이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투쟁을 결의한 뒤 동지들을 규합했다.

폭도편책(暴徒編冊)에는 그가 1907년 이후 강원도와 경기도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맹활약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1907년 12월 그의 부하였던 박래수가 체포돼 심문 당한 조서에 따르면, 당시 최도환 의병부대는 일본총 3정, 화승총 40정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대원들은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작전을 펼치거나 소규모 의병으로 유격전을 벌이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최도환 의병장의 경우 주로 양구, 화천, 회양 등지를 다니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수차례 추적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의 월등한 무력에 연이어 패배한 최도환 의병장은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심복들과 골짜기에서 은거하게 된다.

이후 국내 항일투쟁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만주 간도로 넘어가 재기를 도모했으나, 지병이 심해지면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사위인 홍종팔의 집에서 치료를 하던 중 1911년 7월 일본 헌병에게 발각돼 체포되고 만다.

같은 해 춘천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으나 쇠약해진 몸으로 단식투쟁을 하다 체포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911년 8월 3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독립운동가 신숙 선생이 그의 장인이었던 최도환 의병장을 떠올리며 쓴 추도문 중 일부. 최영구씨 제공

■최도환 의병장과 독립운동가 신숙 선생

신숙(申肅) 선생은 가평 출신으로, 살아생전 독립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다. 2002년 11월에는 국가보훈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세에 최도환 의병장의 둘째 딸 최백경과 혼인한 뒤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종교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추진하자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담당했고, 이후 대동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구금됐다. 이후 임시정부 수립운동에서 천도교측 연락 임무를 수행하다 경성헌병사령부에 체포돼 악형과 고문으로 수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 후 천도교의 이념에 입각한 통일당을 조직해 총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다 1930년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당시,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또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온 김규식에게 받은 돈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던 중 일본 형사대에 체포돼 보름 간 취조를 받았고, 석방되긴 했지만 해방 전까지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 연금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 이후에는 만주의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한인들의 귀국을 돕는 일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러한 공훈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 독립운동가 신숙 선생. 국가보훈부 제공

신숙 선생은 국가보훈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될 만큼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 비교적 잘 알려져있지만 그의 장인이 최도환 의병장이었고, 그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양구에 마련된 장인의 묘를 찾아 ‘우리나라의 광복 선열 중 한 분’, ‘둘도 없는 영웅으로 칭송이 자자했다’고 표현한 추도문을 읊기도 했다. 그는 추도문에서 최도환 의병장에게 이같이 말한다.

“신숙은 실인(室人) 최씨와 함께 우리나라의 광복 선열 중 한 분이시며 나의 빙부이신 최공(최도환 의병장) 존령 앞에 읍고 하나이다.”

“공은 가정의 빈한 소치로 학업을 완성치 못하고 성장함에 이르러는 상업에 종사하여 각종 상사에 물주가 되었으며 도처에 신의를 주로하고 동취서대의 무전대상으로 활수(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는 말)를 발휘하였었다. 그리하여 언제든지 종업원들의 생계를 자타의 구별없이 독담주판하여 그야말로 장의소재의 기풍은 당시 양구 일대에서 둘도 없는 영웅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 (중략)

“불초(부모 앞에 자신을 낮춰 이르는 말)는 3·1 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사업에 분투하다 떠난 지 27년 만에 해방 이듬해인 병술년(1946) 말에 귀국했습니다. 그때 양구지역은 이북에 속하여 왕래가 단절되었다가 그 후 수복되어 이남에 편입된 관계로 이제야 비로소 초소에 참배케 되오니 이에 죄송한 땀이 등골에 흐르고 비감격(悲感激)한 눈물이 앞을 가리워 참으로 몸둘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열악한 상태로 항전했던 의병부대 활약상 재조명돼야

▲ 최도환 의병장의 후손 최영구씨

최도환 의병장의 증손자 최영구씨는 어릴 적 춘천시청 광장에서 거행됐던 3·1절 기념식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큰아버지가 훈장을 전수받았는데, 당시만 해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독립유공자 훈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최 씨는 “증조부를 비롯한 의병부대는 굉장히 열악했다”며 “그런 상황에서도 일본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했던 의병항쟁을 후대가 제대로 기억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지만 부대는 열악했고,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신숙 선생이 쓴 추도문에도 그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공(최도환 의병장)은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의 체결을 찬성 선언한 일진회(一進會)를 구적시(仇敵視) 하다가 병오7협약에 의하여 군대가 해산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분연히 의기(義旗)를 들어 인근 8읍의 의병을 취합하는 동시에 총대장의 추대를 받아 강원 일대에 자못 성세(聲勢)를 떨쳤으나 때가 이롭지 못하고 운이 또한 순탄하지 못하여 마침내 실패하고 통감정치(統監政治)가 실현되자 더욱 강압을 가하는 일방(一方) 회유정책(懷柔政策)을 베풀어 일반 수종자(隨從者)는 다 귀순(굴복하고 복종함)하였으나 유독 공은 종내불굴(從乃不屈)하고 산 중에 이리저리 피신 할때 왕왕(往往)히 대호(大虎)를 동반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가진 고생을 겪으면서 오개성상(五個星霜)을 지난 신해(辛亥, 1911년) 7월경에 이르러 우연히 어든바, 신병은 도저히 희생할 가망이 없게되자 부득이 가정과 연락을 취하여 제사여서 홍종팔의 집 뒤방에 잠처치료케 되었다 한다”

그럼에도 의병들은 굴하지 않았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일본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같은 의병항쟁은 국민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의 불씨가 됐다. 이후 3·1운동, 임시정부수립 등 독립역사가 이어져올 수 있었다.

최도환 의병장의 증손자 최영구씨는 “최도환 의병부대를 포함해 수많은 의병들이 열악한 상태에서 일본군과 맞서 항전했다”며 “정부와 지자체는 이같은 의병부대들의 활약상을 재조명하고, 추모사업 등을 발굴하는 등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최현정 hjchoi@kado.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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