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씹다 버려진 껌딱지에 예술을 담다…英 환경예술가 벤 윌슨

조아현 통신원 2025. 4. 2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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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아름다움·긍정적 가치로 바꾸는데 20년 몰두
"외적 존재를 통제하기보다 나의 행동으로 변화 추구"
영국의 유명 환경 예술가 벤 윌슨(Ben Wilson)이 밀레니엄 브리지 바닥 위에서 아크릴 물감을 손에 쥔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조아현

(런던=뉴스1) 조아현 통신원 =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St Paul's Cathedral) 성당 앞에서 현대 미술관 테이트 모던(Tate modern)까지 우아하게 뻗은 은회색의 밀레니엄 브리지가 봄 햇살에 반짝인다. 다리 입구를 오가는 인파들 사이에서 선명한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은 장신의 남성이 양쪽 어깨에 짐을 둘러메고 오른손에는 화구 가방을 든 채 걸어간다. 도심 곳곳에 눌어붙은 껌딱지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영국의 환경 예술가 벤 윌슨(Ben Wilson)이다.

윌슨은 '츄잉검맨(Chewing Gum Man)' 또는 '길거리의 피카소'로 불린다. 20~30대 젊은 시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한 대형 작품을 주로 만들었고 목재 조각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관심사는 지속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담배꽁초, 깡통, 과자 비닐봉지와 같은 버려진 쓰레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도심을 흉물스럽게 만드는 주범 가운데 하나인 껌딱지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실험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2004년부터 껌딱지 위에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담아냈다. 이는 예술가로서 소비주의가 사회와 개인,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등 유럽 전역을 무대로 껌딱지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외면받는 '불쾌한' 쓰레기를 놀라움으로 바꾸다

윌슨이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영국 현지인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프랑스, 포르투갈에서 온 해외 여행객들도 윌슨을 알아본다. "당신이 하는 행동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워요!"

윌슨이 작업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청소용 솔과 물로 시커먼 껌딱지와 주변의 지저분한 자국을 청소한다. 작은 토치로 껌딱지를 조금씩 그을려 알맞은 질감으로 만든 뒤 아크릴 물감으로 배경색을 덧칠한다. 가느다란 붓으로 정밀하게 그림을 그려 넣고 다채로운 색감으로 생동감을 더한다. 이어 투명 래커 스프레이를 뿌리면서 작품이 망가지지 않도록 겉면을 코팅하고 건조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즉흥적으로 특정 아이콘이나 동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지나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그들의 인생사를 작품에 녹여내기도 한다. 이날은 따사로운 봄 햇살에 영감을 받아 따뜻한 노란색과 밝은 황금색으로 둥근 태양을 표현하고 해를 떠받치면서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늘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의 연결성(connectivity)이다. 대부분의 작품 크기는 동전과 비슷할 정도로 매우 작다. 윌슨은 "껌딱지 작품은 단순한 인물이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상형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껌딱지 안의 세계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읽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죠." 그는 웃었다.

길바닥에 엎드려서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작업 특성상 오해도 자주 받는다. 윌슨은 "나를 노숙자로 보기도 한다"며 "(나를) 쓰러진 사람으로 오해해 구급차가 출동한 적도 많았고 경찰서에 끌려가 구금된 적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나를 아는 경찰들도 생기다 보니 이전만큼 자주 끌려가진 않는다"고 했다.

윌슨이 껌딱지 예술을 꾸준히 지속해 온 지도 벌써 20여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는 60대에 접어들었다.

벤 윌슨이 제작한 위의 껌딱지 작품은 밀레니엄 브리지 바닥 표면에 난 홈에 가로막힌 연인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조아현

긍정적 가치로 변화시키는 건 '나의 행동'

윌슨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의미가 미리 정해져 있으면 좀 지루해지는 것 같다"며 "그냥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큐레이터의 설명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치밀한 사전 계획보다는) 직관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설명한다.

윌슨은 주어진 상황이 달갑지 않더라도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강조한다. 윌슨은 "다들 상황을 통제하려고 든다"며 "하지만 모든 건 그냥 존재하게 둬야 하고 그 상황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결국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예술 행위를 두고는 누군가의 무심한 행동으로 버려진 쓰레기를 긍정적인 가치로 바꾸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윌슨의 껌딱지 작품은 마치 도심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존재가 됐고 행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 속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현실과 단절될수록 무감각해지고 훨씬 더 파괴적으로 변해"

윌슨은 확고한 평화주의자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가자 전쟁에 대해서도 "사실상 집단 학살과 다름없다"며 "가자 지구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결국 '기계화(mechanisation)'라는 문제로도 연결된다"라고도 짚었다. 그는 "예전에는 싸울 때 칼을 들고 직접 상대와 마주해야 했다면 지금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과 단절되고 무감각해질수록 (인간은) 훨씬 더 파괴적으로 변한다"고 꼬집었다.

윌슨은 화상 공간이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이뤄지는 소통보다는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며 서로의 마음이 닿는 '진짜'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거기서부터 인간적인 교감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촉발된 진심 어린 대화와 상대 처지에 대한 깊은 공감은 그의 작품에도 반영된다.

윌슨은 밀레니엄 브리지에 있는 자기 작품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서 고향에서 투병하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향수병으로 힘들어하던 한 스페인 여성의 사연을 소개했다. 또 이라크와 영국의 우호 관계를 소망하던 한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윌슨은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코로나 이후에 더 분명해졌다"며 "매일의 소통과 얼굴을 마주하는 대화는 우리 삶의 핵심이고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많은 다국적 기업이나, 은행, 대형 유통 업체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벤 윌슨이 세인트폴 성당에서 밀레니엄 브리지로 이어지는 길목의 한쪽 계단에 만든 위의 껌딱지 작품 안에는 ‘감사합니다’라는 한글과 태극기가 있다. 윌슨은 우측 상단에 한국이 지금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해를 그려 넣었다. 아래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 비둘기와 무궁화,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노랑나비가 차례로 새겨졌다. @조아현

'무궁화와 노랑나비'…한반도에 전하는 평화의 바람

한국과 관련된 작품도 그린 적이 있는지 물어보니 "몇 개 있지만 우리는 오늘 새로 하나 만들 수도 있죠"라고 말했다. 적당한 껌딱지를 찾자마자 곧바로 물과 청소용 솔을 꺼내 다시 껌딱지와 주변 이물질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작품 안에 들어갈 내용을 요청했다. 잠시 고민하다 거리를 지나면서 이 작품을 발견할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니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가 떠올라 한 글자씩 정성스레 적었다. 뜻을 듣더니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격려해 준다.

윌슨은 과거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에서 수많은 여성을 동원해 성노예로 착취한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군이 주둔했던 대만, 베트남,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성노예 피해자가 있었던 사실도 알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피해자가 얼마나 있었는지 나에게 물었다. 최소 3만 명에서 많게는 4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자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윌슨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가치가 더욱 필요해지는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윌슨은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무궁화와 추모의 노랑나비를 그려 넣었다.

그는 "껌딱지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 한국에서 온 분들을 만날 때마다 진심으로 이해받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며 "언젠가 한국도 꼭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해당 작품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밀레니엄 브리지 입구로 연결되는 길목의 계단 한쪽 모퉁이에 남겨졌다. 런던 밀레니엄 브리지를 갈 계획이 있다면 자랑스러운 한글과 태극기가 그려진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조그만 껌딱지를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가 될 것이다.

shinkir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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