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을 연주한 조성진…시대를 초월한 두 귀공자의 만남 [김성록의 클래식 이야기]
조성진, 정제된 감성과 형식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다
(시사저널=김성록 클래식 해설가)
조성진은 지금 모리스 라벨이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다. 그는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을 담은 앨범을 발표하고, 글로벌 투어에 나섰다. 단순한 헌정이나 기획 차원을 넘어선 이번 프로젝트는 라벨 음악의 본질을 탐구하고 조성진 자신의 예술적 지향을 투영하는 깊은 성찰의 결과물이다.
두 사람은 모두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출신으로, 섬세함과 완벽주의라는 공통의 기질을 지녔다. 라벨은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본질만을 정제한 작곡가였고, 조성진은 그 디테일을 구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연주자다. 이들의 음악은 차가운 계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속엔 조용하고도 강렬한 열정이 응축돼 있다.

완벽주의자 라벨, 기계처럼 정밀한 예술가
모리스 라벨은 프랑스 음악사의 독보적인 존재다. 고전적 형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늘 파격과 실험을 도입했다. 그는 낭만주의 퇴조 이후, 인상주의와 신고전주의 경계에서 자신의 색깔을 구축했다. 드뷔시와 종종 비교되지만, 라벨은 좀 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음악 언어를 구사했다. 드뷔시가 회화적이고 감성적인 흐름에 중점을 뒀다면, 라벨은 그 감성을 정교하게 다듬어 건축하듯 짜맞췄다. 그래서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을 '스위스 시계 장인'에 비유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함, 그것이 라벨 음악의 핵심이었다.
그 대표작 《볼레로》는 전통적인 형식을 거부하고 단일 선율과 리듬을 반복하면서 점층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발전부 없이 제시부와 재현부만으로 구성된 이 곡은, 15분간 오직 하나의 멜로디와 리듬으로 승부를 건다. 반복되는 구조 속에 등장하는 악기의 변화, 음색의 확장,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는 청중에게 강렬한 몰입과 해방감을 선사한다.
라벨은 이 곡을 작곡하면서 "내 생애 가장 독창적이지 않은 작품"이라고 표현했지만 반복을 통해 새로움을 만들어낸 이 곡은 결과적으로 라벨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됐고, 클래식 역사상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 중 하나가 됐다. 《스카이캐슬》 《오션스12》 《밀정》 《슈렉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삽입되며 문화적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라벨도 생전에 이 곡이 매년 200억원이 넘는 저작권 수익을 창출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4월30일, 이 불멸의 선율이 다시 한번 스크린을 울린다. 라벨의 삶과 작품 세계, 그리고 《볼레로》가 가진 음악적 혁명성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라벨의 천재성과 고독, 시대를 초월한 예술혼을 탐색한 이 작품이, 조성진의 연주와 더불어 라벨을 다시 만나는 또 하나의 길이 될지 모르겠다.
라벨은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 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절제된 성격으로 프랑스 사교계에서 주목받았지만, 허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원입대를 시도했고, 건강 문제로 전선은 어렵다는 판정에도 운전병으로 복무하며 조국에 헌신했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함께 시민으로서의 책임감도 지녔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섬광
그의 예술관은 로마대상 도전에서도 드러난다. 다섯 차례 연속 탈락한 이 사건은 음악원의 편파성과 구태의연한 심사 기준을 폭로하며 '라벨 사건'으로 확산됐고, 제도 개편까지 이끌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려 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절했다. 명확한 이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예술은 권위에 의해 증명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신념이 담긴 결정이었다.
그는 다수의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먼저 작곡한 뒤,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피아노는 라벨에겐 정직한 스케치북이자 실험실이었다. 조성진은 그 피아노 선율을 통해 라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단순히 음표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음이 지닌 색채와 질감, 상상 속의 악기까지 되살려낸다. 그의 손끝에서 피아노는 관현악처럼 울린다. 조성진의 안정적이고 따뜻한 저음은, 마치 라벨의 음악에서 울리는 바순이나 첼로의 음색을 연상케 한다.
특히 이번 앨범의 하이라이트인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는 라벨 피아노 독주곡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도전적인 작품이다. 세 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이 모음곡은 몽환과 공포, 환상과 절제의 경계를 그린다. '옹딘'의 물결처럼 출렁이는 아르페지오, '세레나드의 마크'에서의 불협화음, '기요'의 죽음과 처형의 이미지 등은 청중에게 음향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빠르고 강렬한 테크닉은 리스트를 능가할 만큼 까다롭고, 표현의 폭도 극단적이다.
그러나 조성진은 이 난곡을 단순히 기술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라벨의 세계관을 음악으로 번역해 낸다. 그는 이 곡의 어둠을 단지 암흑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 안의 온도와 숨결, 인간적인 떨림까지 구현해 낸다. 라벨이 지향했던 것은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정제된 감정, 그리고 미적 균형이었다. 조성진은 그 의도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다.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은 총 2시간15분 남짓이다. 짧지만, 그 안에 담긴 밀도와 섬세함은 압도적이다. 조성진의 이번 프로젝트 목적은 단순한 앨범 발매가 아니다. 라벨이라는 작곡가의 정신과 음악을 되살리는 작업이며, 동시에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 깊이 확장시키는 계기다. 이 프로젝트는 클래식 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조성진이 왜 지금 세계 클래식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앞으로도 우리는 조성진을 통해 라벨을 다시 듣고, 라벨을 통해 조성진의 새로운 면모를 계속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음악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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