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사회 뒤로 빼고 감세에 원전도 유지…李, ‘보수의 언어’ 쓰며 중원 공략
“유연한 리더십” vs “포퓰리스트”…지난 대선 복기하며 중도층 공략에 방점
(시사저널=박성의 기자)
경제를 위한 유연한 선회일까, 표심을 노린 위장 전술일까. '6·3 장미대선'을 앞두고 '달라진 이재명'이 정치권 화두로 부상했다. 한때 진보의 아이콘으로 주목받던 그는 이제 '중도보수의 깃발'을 치켜들고 당의 간판 공약을 줄줄이 폐기하거나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 정책이었던 이른바 '기본사회 시리즈'는 대선 국면에서 후순위로 밀려나 사실상 자취를 감췄고,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도 제동이 걸렸다. 동시에 그의 입에선 분배보다는 성장이, 증세보다는 감세 등 '보수의 언어'가 언급되는 횟수가 잦아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시대 변화에 맞는 영리한 선택"이라는 분석과 "권력을 위한 포퓰리즘(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이라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된다. 대권 갈림길 앞 '우회전 깜빡이'를 켠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이재명. 그의 변화는 대권 쟁취를 앞당기는 승부수가 될까, 역공의 빌미를 주는 자충수가 될까.
소득 분배보다는 경제 파이 키우는 데 중점
"기본소득은 반드시 시행한다."(2021년 7월22일, 정책공약 기자간담회에서)
"기본사회로의 대전환이 시작되는 원년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2023년 1월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나누는 문제보다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상황이다."(2025년 1월2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기본 시리즈'에 대한 이재명 후보의 '갈지(之) 자' 행보는 선거철마다 논란이 됐다. 공약 이행 시기와 속도가 시점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자 보수진영뿐 아니라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크게 3가지 질문이 따라붙었다. ①시기에 따라 공약의 우선순위가 바뀐다면 '언제' 도입 가능한 것인지 ②'서민 감세'를 주장하는 이 후보의 기조와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기본 시리즈' 공약이 충돌하는 것은 아닌지 ③이 후보가 해당 공약을 실천할 의지가 실제 얼마만큼 있는 것인지가 정치권에서 논란이 됐다.
'6·3 장미대선'을 앞둔 지금도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20대 대선 경선 당시인 '2021년의 이재명'과 21대 대선을 준비하는 '2025년의 이재명'이 내놓는 공약, 과거의 민주당과 지금의 민주당이 그리는 미래가 너무 다르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다.
당장 '기본사회'를 대하는 이 후보의 태도에 변화가 감지된다. 소득의 분배보다는 경제의 파이(pie)를 키우는 데 공약의 방점을 찍는 모습이다. 그는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며 실용주의 노선을 강조했고,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뒷받침하는 민간 주도 정부 지원"을 언급하며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보다는 MB(이명박 정부)식 '낙수성장 모델'과 가까운 경제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이 후보의 '우클릭'은 복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장 에너지 정책에서도 과감한 선회를 시도하는 모습이다. 이재명 캠프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기조와 거리를 둔 채 원전의 수명 연장과 SMR(소형모듈원전) 활용을 포괄하는 '에너지 믹스' 정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의 외곽 정책 자문그룹 '성장과 통합'의 유종일 상임공동대표도 4월16일 출범식에서 "신재생에너지 확대 등으로 합리적인 에너지 믹스 정책이 필요하다"며 "과거의 정책과는 기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할 것"이라고 했다.
이 후보는 조세 정책에서도 '증세'보다는 '감세'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 후보는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3월초 상속세제 개편 방향을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배우자 상속세 폐지에 동의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민주당은 상속세 공제한도를 10억원에서 18억원으로 올리는 방안도 내놨다. 이재명 캠프 TV토론 단장인 이소영 민주당 의원은 4월24일 배당성향이 35% 이상인 상장법인의 배당소득에 대해 별도 세율을 적용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이 후보가 4월21일 금융투자협회를 찾아 배당소득 분리과세를 언급한 지 사흘 만이다. 이에 진보진영 일각에선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가상자산 과세 유예에 이어 민주당이 '부자 감세'에 나서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으나, 이 후보 측은 경제 성장을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입장이다.
이 후보는 변심한 것일까. 달라졌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①민주당은 이를 시대 변화에 반응하는 '유연한 리더십'이라 자평한다.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정세도, 경제 상황도 시시각각 급변하는 가운데 대통령 후보가 지난 대선의 공약을 '복사-붙여넣기' 하는 행태야말로 구태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친명(親이재명)계 의원이자 이재명 캠프의 핵심 관계자는 "트럼프의 재등판, AI(인공지능)의 부상, 비상계엄 모두 3년 전 대선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변화"라며 "이 상황에서 과거의 이재명과 지금의 이재명이 같다면 그것이 퇴보"라고 주장했다. 이어 "시대 변화에 맞게 유연하고 실용적인 선택을 하는 게 현 시대 리더의 자질"이라며 "낡은 신념과 이념에만 빠져 '빠르게 가'만 외치다가는 파국을 맞는다는 게 윤석열 정부의 교훈"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②'12·3 비상계엄' 후 달라진 정치 지형이 이 후보의 '우회전'을 가능케 했다는 진단도 나온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정부 심판론'이 거세게 불며 범진보·중도 진영이 분열했던 것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탄핵 책임론'에 힘입어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기류가 확산하고 있다. '집토끼'가 결집한 상황에서 이재명 후보가 과감히 '산토끼' 사냥에 나설 환경이 갖춰진 셈이다. 즉, 50%를 넘나드는 압도적인 지지율이 '이재명의 과감한 변신'을 가능케 했다는 얘기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이 후보가 중도층에 대한 정책적인 승부수를 던진다면 60%의 득표율도 얻을 수 있다"며 "이는 향후 대통령이 됐을 때 국정 운영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봤다.
"李의 변신, 자신감 아닌 불안함의 발로"
반대로 ③이 후보의 변화는 자신감이 아닌 불안함의 발로라는 시각도 있다. 이 후보의 '우클릭'은 지난 대선 패배의 '오답노트'를 푸는 과정으로, 여론조사에 표집되는 중도·무당층을 강하게 의식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0.73%p(포인트) 차로 패하며 낙선한 바 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역대 최소 격차로, 민주당은 보수의 강한 결집세와 중도층 공략의 중요성을 절감해야 했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도 '반명(反이재명) 빅텐트' 가능성이 부상하는 가운데, 4월24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NBS) 결과에 따르면 아직 지지 정당을 정하지 않은 무당층 비율만 18%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응답률 20.0%,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이 후보의 '우클릭'을 비판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정치 전문가들뿐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보수 유권자를 의식해 감세와 탈원전 폐기 등을 공약하는 것은 지나치게 표심을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4월18일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TV토론회에서 김동연 후보는 "정치권에서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적 감세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 후보의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AI 기본사회 공약 등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증세까지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김경수 후보 역시 "이 후보가 얘기한 조세지출 조정만으로는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증세 필요성을 주장했다.
한편에선 문재인 정부에서 탈원전에 찬성하고 증세 필요성을 강조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이 후보의 변화에 아무런 이견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을 두고 '비겁한 행태'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후보의 노선 전환에 대한 공개적 토론 없이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은 당이 표 계산에만 몰두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4월22일 시사저널TV에 출연해 "재원이 많이 들어가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당에서는 감세를 얘기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민주당이 진보를 표방한다면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이 있는데 이 후보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라며 "그런데 당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올 여지가 없으면 민주당의 위기는 오히려 집권 후에 시작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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