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한국 “협의” 신중론, 미국 “합의” 속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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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세협상 ‘7월 관세 폐지 패키지 딜’ 미묘한 입장차
한국과 미국 재정·통상 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재무부 청사에서 ‘2+2 통상 협의’를 갖고 고율 관세를 둘러싼 해법 모색의 시동을 걸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스콧 베센트 미 재무부 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의 2+2 협의 후 브리핑을 통해 “상호관세 유예가 종료되는 7월 8일 이전까지 관세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7월 패키지(July Package)’를 마련하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밝혔다. 양국이 유예 기간 내에 관세와 비관세 통상 현안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패키지 합의를 추진한다는 의미다. 안 장관은 ‘7월 패키지’에 대해 “상호관세 유예 기한(90일)이 7월 8일”이라며 “그때까지 협의하는 협상 목표치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최상목 부총리는 “한국에 부과된 관세에 대한 면제와 예외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미국의 주요 관심사인 무역 투자, 조선, 에너지 등에서 한국의 협력 의지와 비전을 소개했다”고 말했다. 이날 통상협의가 끝나고 백악관에서 열린 미·노르웨이 정상회담에 참석한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우리는 한국과 매우 성공적인 양자 회의를 가졌다”며 “그들은 최선의 제안(A game)을 가져왔고, 우리는 그들이 이를 이행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답했다.
향후 양국 간 협의는 ▶관세·비관세 조치 ▶경제안보 ▶투자 협력 ▶통화(환율) 정책 등 4개 분야에 초점을 맞춰 이뤄진다. 다만 이번 2+2 협의에서 방위비 분담금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군(軍)이 합의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 나라는 큰 틀에 대해 합의를 했지만, 내용에서는 결이 달랐다. 미국은 ‘합의’에, 한국은 ‘협의’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베센트 장관은 이날 “우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며 “우리는 이르면 다음 주 양해에 관한 합의에 이르면서 기술적인 조건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 부총리는 “우리 정치 일정이 있고, 행정부 권한 범위나 입법부 동의를 받아야 할 것도 있고 해서 협의 과정에 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얘기했고, 상대 측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인도·영국·호주를 우선 협상 대상으로 꼽은 트럼프 행정부는 조기에 가시적 성과를 냄으로써 관세 정책의 효과로 대내외에 널리 홍보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때문에 최종적 타결까지 안 가도 트럼프 행정부가 성과 홍보 차원에서 일부 분야별 합의를 성과물로 발표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중국과 협상에 대해서도 조급함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중국과 매일 협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가짜 뉴스”라며 전면 부인했다.
미국 “한국, 최선의 제안 가져왔다”…방위비 언급 안 해
그동안 관세 협상에서 미국과 중국은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관세전쟁에 승자는 없다. 그래서 중국도 메모리칩을 제외한 미국산 반도체 8종에 대해 보복 관세를 철회했다는 외신 보도가 25일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강경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중국보다 더 개방된 경제인 미국에서 관세전쟁의 타격이 더 빨리 나타나고 있어서다.
우선 달러·주식·채권이 일제히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를 나타내며 미국 금융시장에서 자금이 유럽 등으로 대거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셀 아메리카(sell America)’다. 여기에 소비·투자 심리는 냉각되고 여론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미국 경제성장률을 실시간으로 추정하는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GDP 나우(now)’ 모델은 1분기 성장률 전망치를 내렸다. GDP 나우는 24일 기준 1분기 성장률이 전기대비 -2.5%로 추정됐다고 밝혔다. 지난 17일 제시한 -2.2%보다 0.3%포인트 낮다. 또 미 부동산중개인협회(NAR)는 3월 미국 기존주택 매매 건수가 402만건으로 전월 대비 5.9% 감소했다. 3월 거래량 감소 폭은 2022년 11월 이후 가장 큰 수준이다.
23일 폭스뉴스가 지난 18~21일부터 미국 유권자 1104명을 대상으로 한 ‘트럼프 2기 100일 평가’ 여론조사는 악화하는 민심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전반적인 직무 수행에 대한 지지도는 44%로 지난 3월(49%)보다 5%포인트 하락했다. 이는 조 바이든(54%), 버락 오바마(62%), 조지 W 부시(63%) 등 다른 역대 대통령보다도 낮다. 주요 현안에서 지지율은 경제(38%), 인플레이션(33%), 관세(33%), 외교(40%), 세금(38%) 등으로 대부분 긍정 평가보다 부정 평가가 우세했다. 특히 인플레이션 문제에 대한 부정평가는 59%로 가장 컸다.
한편 한·미 협상에서 한국 대표단은 미국에 선물 하나를 건넸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의 주력 산업과 경제발전 기념주화’다. 한국 조선업 기술력을 상징하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거북선 문양이 새겨진 것이다. 양국 간 조선 협력에 대한 한국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선물이다. 한·미 조선 분야 협력이 미국의 관세를 낮추는데 ‘윈-윈 카드’로 활용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전에도 꾸준히 제기됐다. 한국은 세계 1위 조선 기술력을 보유한 데 반해 미국의 조선 산업은 쇠퇴해버린 ‘아픈 손가락’이라서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 내 조선소는 300개가 넘었지만, 현재는 20개 미만에 불과할 정도로 미국의 선박 건조 역량이 후퇴했다. 이는 군사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미 조선 분야 협력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패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카드 중 하나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미국은 미국 내에서 더 많은 선박을 건조하려고 하지만 이는 현재로썬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며 “세계 1위 조선 기술을 확보하고, 조선 시장에서 중국과 경쟁하고 있는 한국은 미국에 즉각적인 구제책을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최근 기관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날 통상협의에서도 국내 기업의 대미 투자와 협력 사례가 비중 있게 언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첫 협상에서 한국이 협상 의제·범위·스케줄 등에 대한 포지셔닝을 잘했다”며 “특히 조선 등 미국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 대한 협력 강화를 어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에 한국이 잘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설명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미, 한·일에 알래스카 LNG 투자 압박=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에 투자하라는 미국 정부의 압박도 함께 거세지고 있다. 24일 뉴욕타임스(NYT)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에너지 관련 자문을 하는 국가에너지지배위원회(NEDC)가 오는 6월 2일 알래스카에서 열리는 회담에 한국과 일본 통상 당국자를 초청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고위급 회담을 열어 알래스카 LNG 개발사업이나 가스 구매에 대한 투자의향서(LOI)를 체결하는 걸 NEDC는 추진 중이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배현정·김원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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