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주지 마세요” 목관 속 교황이 얘기하는 듯했다
‘육신의 덧없음을 아세요. 욕심에 빠져 싸우고, 빼앗고, 상처 주지 마세요. 사랑과 평화를 나눕시다.’
24일 저녁 화려한 장식 없는 목관에 누워 말 없이 천장을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은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선종한 날(21일)로부터 나흘째. 관에서 약 4m 앞에 설치된 울타리를 붙잡고 바라본 교황의 얼굴색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대 교황들처럼 자신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기를 원치 않았다. 다만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고자 주사를 이용한 임시 처리(엠바밍)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로우면서도 죽음의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교황의 모습에 조문객 모두가 숙연해졌다. 성 베드로 대성전 내부의 화려함에 감탄하며 연신 사진을 찍던 이들도 교황의 시신 앞에선 스마트폰과 사진기를 내려놓았다. 조문객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몇 초.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마다의 방식으로 교황을 추모했다. 어떤 이들은 성호를 그으며 무릎을 굽혀 경의를 표했고, 어떤 이들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신자가 아닌 이들도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관 주변에는 생전에 가까웠던 이들과 여러 성직자 및 수도자들이 모여 연도(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문을 읊조리다 눈물을 훔치는 이들, 교황의 선종이 믿기지 않는 듯 관 옆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녀들도 있었다.
당초 자정까지로 제한했던 조문을 새벽까지 연장하면서, 한때 바티칸 바깥까지 1㎞ 이상 늘어섰던 줄은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사람이 2~6 시간의 기다림 끝에 교황을 만났다. 교황의 조문은 25일 오후6시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두 시간 뒤 관을 덮는 ‘관 봉인 예식’이 치러졌다. 세상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교황의 장례식은 26일 오전 10시 관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추모 기도를 하면,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의 미사 시작 기도가 이어진다. 뒤이은 ‘말씀의 전례’(성서 봉독)에서는 교황의 생애와 신학적 메시지를 반영한 성경 구절이 낭독된다. 강론은 미사를 집전하는 패럴 추기경이 할 가능성이 높지만, 교황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다른 사제가 맡을 수도 있다.
뒤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성찬례를 통해 영성체 의식이 치러지고, 성직자와 신자들이 관 주변에 모여 마지막 기도를 바치는 ‘고별식’이 열린다. 이 자리에는 평소 교황이 큰 관심을 쏟았던 이민자와 난민 대표도 참석한다. 두 시간여에 걸친 장례 미사 후 교황의 관은 장지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성모 대성전)까지 약 6㎞의 길을 따라 운구된다.
교황이 바티칸 밖에 묻히는 것은 1903년 로마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된 레오 13세 이후 122년 만이다. 운구 행렬이 정확히 어떤 경로를 따를지, 누가 참여해 어떤 모습을 연출할지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 언론들은 교황의 관이 로마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비토리오 거리’를 지나 베네치아 광장,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 등 대표적 명소를 거쳐 장지를 향할 것으로 예상했다. 운구는 차량을 이용하고, 간소한 장례를 강조한 교황의 유지를 따라 최소한의 인원만 행렬에 참여한다고 알려졌다. 교황청은 “시민들과 작별 인사를 위해 행렬은 사람이 걷는 속도로 느리게 이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모 대성전에 도착하는 교황의 관은 빈민들이 맞이한다. 이들은 교황이 생전 좋아했던 성녀 테레사의 꽃, 흰 장미를 바칠 예정이다.
장례 행렬이 지나는 길에는 수십만 명의 로마 시민과 방문객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로마시와 경찰 당국은 “120여 년 만의 역사적 행사”라며 “철저한 경계와 함께 통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 각국 정상 60여 명이 속속 도착하면서 로마는 이미 ‘특별 보안 경계’ 상황에 돌입했다. 성 베드로 광장 일대는 25일 밤부터 차량 진입이 완전히 금지됐다. 또 금속 탐지기를 이용한 보안 검색과 함께 지하·공중에 대해서도 정밀 감시가 시작됐다. 건물 옥상 곳곳에 저격수가 배치됐고, 무인기(드론) 격추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도 곳곳에 등장했다.
성 베드로 광장으로 이어지는 콘칠리아치오네 거리와 로마 시내 주요 광장에는 장례 미사와 운구 행렬을 생중계할 대형 스크린들이 설치됐다. 장지에 도착한 교황의 안장 의식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후 교황의 무덤은 다음 날(27일)부터 바로 조문이 가능할 예정이다. 25일 미리 공개된 묘역의 비석은 유언대로 ‘프란치스쿠스(Franciscus)’라는 라틴어 이름과 평생 목에 걸었던 십자가 모양만 새겨진 단순한 형태였다. 이탈리아 매체들은 “비석은 고급 대리석이 아닌, 리구리아에서 캐낸 ‘민중의 돌’ 슬레이트(건축 자재로 쓰이는 점판암)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리구리아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해안 지방으로, 교황 증조부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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