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는 미아가 되지 않는다

박준 시인 2025. 4. 2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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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 쓰기] (26)
일러스트=유현호

1995년 5월 5일. 저는 그날을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잠시나마 미아(迷兒)가 되어 본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부모님과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한국종합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1회 자동차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고요. 요즘 말로 옮기자면, 코엑스에서 열린 모터쇼였습니다.

5월의 공휴일답게 지하철은 붐볐습니다. 그러다 환승역에서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고요. 인파에 한참 떠밀려 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철역 개표구 직전까지 나오게 됐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득 부모님이 전시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다시 승강장으로 내려가 열차를 탔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자랑삼아 곧잘 외우던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도착한 전시장 입구가 지하철 환승역보다 몇 갑절 더 혼잡했다는 사실.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함께 외출한 부모님이 받을 리 없었습니다. 저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가서 집으로 가는 표를 샀습니다. 집까지는 1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 다시 말하지만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자랑삼아 곧잘 외우던 초등학교 고학년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집 근처 역에 막 도착했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두려운 마음과 익숙한 풍경을 마주한 안도감이 한데 뒤섞여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동네에서라면 마음 놓고 울어도 되니까. 동네는 그동안의 숱한 울음을 묵묵히 지켜봐 주었으니까. 마치 가족이나 오랜 친구처럼.

이날의 기억을 저는 ‘미아’라는 시로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잡고 있던 손은 놓치고 가방까지 어딘가에 흘리고 그렇게 서로를 잃어버렸을 때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처음 든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네가 나를 찾을 필요는 없어 내가 너를 찾을 거야.”

향수나 추억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 고여 있는 고향과 달리, 동네라는 말에는 일상과 현재의 감각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연히 동네는 단순한 행정구역의 개념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생활의 감각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동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갓 구운 빵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제과점을 찾는 일, 원두를 사러 나섰다가 이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떠올리고는 중간에 발길을 돌리는 일,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서는 안 된다는 핀잔을 병원 의사에게 듣는 일, 한참을 서성거리고 머물러도 눈치 주지 않는 책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나보다 더 내 머리 모양을 지겨워하는 미용사가 있는 일….

이런 일들은 모두 동네에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세련된 도시가 아니라 여전하고도 익숙한 동네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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