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치유해 준 동백아가씨

유주현 2025. 4. 26.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대와 작별 고하는 이미자
이번 주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국 대중가요사의 한 페이지가 넘겨진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26~27일 전통가요 헌정 공연 ‘맥을 이음’을 끝으로 사실상 은퇴를 시사했다. 평생을 불러온 전통가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은 150분간 공연에 주현미·조항조가 그 맥을 이어갈 후배로 함께한다. 1959년 데뷔 이래 66년간 무대를 지켜온 이미자는 단지 한 명의 가수를 넘어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을 노래로 기록한 증인이었다. 이제 무대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디바는 “노래는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2000여 곡의 ‘운명의 노래’들이 아로새겨진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미자가 한국 가요사에 남긴 의미를 음악평론가 강헌이 돌아봤다.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끝없이 기나긴 길을 따라 꿈 찾아 걸어온 지난 세월/ 괴로운 일도 슬픔의 눈물도 가슴에 묻어놓고/ 나와 함께 걸어가는 노래만이 나의 생명…”

작곡가 백영호·박춘석과 명곡 퍼레이드
2019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데뷔 60주년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이미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1989년 가을 세종문화회관,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콘서트에서 이 작은 몸의 여왕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곡가 박춘석이 헌정한 ‘노래는 나의 인생’이 담담하게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홀을 가득 채웠다. 그해 초 대중음악에겐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이 데뷔 동기로 똑같이 30주년을 맞게 되는 두 여제 이미자와 패티김의 단독 공연을 승인했다. 1978년 개관 이래 클래식 공연의 전유물이었던 세종문화회관의 고고한 문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두 명의 자문위원이 이 결정에 반발해 사퇴했지만 시대의 도도한 흐름까지 막을 순 없었다.

3822석의 대극장 무대는 한 사람의 가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 하지만 나는 그날, 진정으로 ‘전설’이라고 부르기에 마땅한 한 여가수가 쌓아온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소리의 품격과 위엄을 보았다. 몸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1950년대부터 도약의 1980년대까지 천신만고의 한국 현대사와 동행하며 이루어낸 그의 위대한 노래 목록은 드넓은 무대 공간을 서서히 사라지게 만드는 황홀경을 선사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에서 발매된 이미자의 앨범 ‘사랑의 붉은 등불’. [중앙포토]
앞으로 백년의 시간이 더 흐른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이미자라는 이름을 비켜갈 수 없다. 그는 전쟁으로 모든 부문이 쑥대밭이 된 참혹한 폐허에서 오로지 한길을 걸으며 지금은 ‘K-팝’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한국 대중음악을 중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미자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음반을 발표했으며, 거의 20년 동안 쉴 새 없는 히트 넘버들을 터트렸고, 이에 따르는 엄청난 인기와 여왕의 명예를 얻었다. 그는 단 세 사람밖에 없는 금관문화훈장의 수훈자 중 한 사람이며(나머지 두 사람은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과 방송인 송해로, 송해는 사후에 추서되었다), 대중음악 분야는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은 그 덤이다.

모든 것이 결핍 그 자체였던 1959년, ‘열아홉 순정’이라는 노래를 들고 열아홉살 소녀가 데뷔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소녀가 한국 대중음악사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작사계의 거물 반야월이 노래말을 쓰고 고참 작곡가 나화랑이 만든 이 깜찍한 노래는 트로트가 아니라 전후에 유행하던 미8군 무대 스타일, 즉 스윙 스타일의 경쾌한 댄스곡이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런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장르에선 머잖아 그의 라이벌이 될 패티김과 경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패티김은 압도적인 비주얼과 거침없는 무대 매너 그리고 폭발적인 가창력까지 탑재하며 곧 온 국민의 연인이자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디바로 부상할 터였다. 특히 도시의 젊은이들은 이 신선한 디바에 열광했고 1960년대와 함께 시작된 TV 방송은 패티김을 위한 채널인 것처럼 그와 사랑에 빠진다.

4·19와 함께 시작된 격랑의 60년대는 미8군 무대 댄서 출신인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와 트위스트 붐으로 뒤덮혔다. 이 노래는 일본과 대만 동남아를 강타했고 1962년엔 가수가 주연까지 맡은 동명의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서구적 리듬의 홍수 속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첫 주류 장르였던 트로트는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이승만 정부 시절 내내 제기되었던 ‘왜색가요 근절’ 정책은 트로트를 식민지시대의 불행한 유산으로 못박고 있었다.

1964년 발매된 ‘동백 아가씨’ 오리지널 앨범. [중앙포토]
‘동백아가씨 신드롬’ 출현 전에 우리가 주목할 노래는 1963년작 ‘님이라 부르리까’이다. 이 노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지만 자신을 픽업한 나화랑의 정통 트로트 곡으로 이미자가 이십대 초반에 트로트의 여제 이난영의 아성에 도전장을 낼 수 있는 완벽한 보컬 완성도의 경지를 획득했음을 단숨에 보여준다. 그리고 만삭의 몸으로 녹음한 1964년의 ‘동백아가씨’의 폭발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이후에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하게 될 그의 딸 정재은은 엄마의 뱃속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인물이 되었다.

작사가 한산도와 작곡가 백영호 콤비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 정통 트로트 넘버는 동아방송의 라디오드라마를 바탕으로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주제가로 녹음되었다. 김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인연을 맺은 섬처녀가 버림받고 술집에서 일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신파물이지만 이 음반의 B면 첫 트랙에 수록된 이미자의 이 노래는 말 그대로 전국을 뒤집어놓았다.

공식적인 기록이 전무하므로 정확한 판매량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어느 정도 확실하다. 이듬해 봄까지 이 음반은 3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왜색가요 시비로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 전까지 1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저그런 기록이겠지만 음반시장 자체가 열악했던 당시엔 3000장만 팔려도 ‘대박’이라 환호성을 지를 때였다.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이 10만 장의 벽을 깨뜨린 최초의 LP로 많은 관계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표곡 일부, 왜색 시비로 금지곡 수난
1994년 KBS창사특집 ‘빅쇼’ 무대에 함께 오른 이미자(왼쪽)와 패티김. [중앙포토]
이 음반 뒤엔 한국 음반산업의 비사가 숨어 있다. 이 음반은 미도파 레코드사에서 최초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 발표 직후 지구(임정수)와 그랜드(김능억)로 레이블이 분리된다. 두 대표는 번갈아가며 기존 발매 음원의 소유권을 지목했는데 지구의 임정수 대표가 제일 먼저 픽업한 음반이 바로 이 ‘동백아가씨’였다. 이 1964년을 기점으로 지구레코드는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조용필에 이르는 수퍼스타들을 보유하며 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레이블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이다.

‘동백아가씨’는 새로운 여왕의 대관식이었고 트로트가 주류 장르로서 제2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이미자의 거침없는 행보는 10년이 넘도록 흔들림없이 이어진다. 그는 지구라는 메이저 레이블을 통해 백영호와 해방 이후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히는 박춘석이라는 ‘투톱’ 작곡가와 상상을 초월하는 명곡 퍼레이드를 시전한다. 이 두 작곡가와만 900곡이 넘는 노래를 취입했고, 그밖에도 고봉산·박시춘·나화랑·이인권·김인배·손목인·홍현걸·남국인·손석우·김영광 등 당대를 아로새긴 대작곡가 군단이 이 영광의 시대를 함께했다. 그리고 트로트는 이미자 자신이 나중에 술회한대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1990년 기네스북 기록으로 이미자는 560장의 음반과 2069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물론 중복된 노래도 많고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기 어려운 구석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아네모네’ ‘그리움은 가슴마다’ (이상 작곡가 박춘석), ‘여자의 일생’ ‘아씨’ ‘서울이여 안녕’ ‘울어라 열풍아’ ‘여로’ ‘빙점’ (이상 백영호), ‘유달산아 말해다오’ ‘섬처녀’ (이상 고봉산) 등등, 빅히트곡만 족히 100곡이 넘는 이 어마어마한 리스트는 장르를 불문하고 그 어떤 경쟁자도 허용하지 않는 불멸의 금자탑임은 명백하다.

‘동백아가씨’가 발표됐을 무렵의 이미자. [중앙포토]
그는 데뷔 후 66년을 오직 한 길을 고수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트렌드의 흥망성쇠가 있었고 ‘동백아가씨’를 위시한 그의 대표곡 일부가 왜색시비로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수난도 겪었다. 그의 견고한 성채인 트로트는 70년대와 80년대에 청년문화와 틴에이저 스타덤에 밀려 쇠락하기도 했고, 자천타천 그의 후계자 주현미와 이른바 4대 천왕의 등장으로 80년대 후반부터 극적인 트로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서태지의 등장과 보이그룹, 걸그룹의 빅뱅으로 다시 주저앉기도 했지만, 이제는 임영웅으로 상징되는 제4세대가 트로트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는 중이다.

이미자는 정통 트로트 역사의 최후의 수문장이다. 깊고 단단한 그의 음색은 저역부터 고역까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맑고 강력하게 표현된다. 그의 발성은 장인이 예리한 칼로 아로새긴 것처럼 정확하게 듣는 이들의 귀와 가슴에 전달되고 그저 피상적인 감정이입을 강요하는 영혼없는 바이브레이션 따위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50년도 넘은 낡은 녹음인데도 지금 세대가 들으면 깜짝 놀란다. 그 어떤 녹음실의 기교도 없이 바위처럼 강인하고 강물처럼 유연한 그의 프레이징에 넋을 잃는다.

그와 그의 노래는 연인처럼 살갑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고통을 인내하며 가난한 집안을 지켜낸 누이의 나직한 음성과도 같다. 뒷산 소나무와 같은 한결같음이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를 지켜낸 것이다. 그의 데뷔 45주년을 기념하며 후배 장욱조가 헌정한 노래가 이렇게 담담하게 펼쳐진다. “내 영혼 노래가 되어 나는 살리라…”

강헌 음악 평론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