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치유해 준 동백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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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작별 고하는 이미자
이번 주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국 대중가요사의 한 페이지가 넘겨진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26~27일 전통가요 헌정 공연 ‘맥을 이음’을 끝으로 사실상 은퇴를 시사했다. 평생을 불러온 전통가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은 150분간 공연에 주현미·조항조가 그 맥을 이어갈 후배로 함께한다. 1959년 데뷔 이래 66년간 무대를 지켜온 이미자는 단지 한 명의 가수를 넘어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을 노래로 기록한 증인이었다. 이제 무대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디바는 “노래는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2000여 곡의 ‘운명의 노래’들이 아로새겨진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미자가 한국 가요사에 남긴 의미를 음악평론가 강헌이 돌아봤다.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끝없이 기나긴 길을 따라 꿈 찾아 걸어온 지난 세월/ 괴로운 일도 슬픔의 눈물도 가슴에 묻어놓고/ 나와 함께 걸어가는 노래만이 나의 생명…”
![2019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데뷔 60주년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이미자. [사진 세종문화회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6/joongangsunday/20250426000155129mpeu.jpg)
3822석의 대극장 무대는 한 사람의 가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 하지만 나는 그날, 진정으로 ‘전설’이라고 부르기에 마땅한 한 여가수가 쌓아온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소리의 품격과 위엄을 보았다. 몸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1950년대부터 도약의 1980년대까지 천신만고의 한국 현대사와 동행하며 이루어낸 그의 위대한 노래 목록은 드넓은 무대 공간을 서서히 사라지게 만드는 황홀경을 선사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에서 발매된 이미자의 앨범 ‘사랑의 붉은 등불’. [중앙포토]](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6/joongangsunday/20250426000156661axoc.jpg)
모든 것이 결핍 그 자체였던 1959년, ‘열아홉 순정’이라는 노래를 들고 열아홉살 소녀가 데뷔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소녀가 한국 대중음악사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작사계의 거물 반야월이 노래말을 쓰고 고참 작곡가 나화랑이 만든 이 깜찍한 노래는 트로트가 아니라 전후에 유행하던 미8군 무대 스타일, 즉 스윙 스타일의 경쾌한 댄스곡이었다.

4·19와 함께 시작된 격랑의 60년대는 미8군 무대 댄서 출신인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와 트위스트 붐으로 뒤덮혔다. 이 노래는 일본과 대만 동남아를 강타했고 1962년엔 가수가 주연까지 맡은 동명의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서구적 리듬의 홍수 속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첫 주류 장르였던 트로트는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이승만 정부 시절 내내 제기되었던 ‘왜색가요 근절’ 정책은 트로트를 식민지시대의 불행한 유산으로 못박고 있었다.
![1964년 발매된 ‘동백 아가씨’ 오리지널 앨범.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6/joongangsunday/20250426000159741vyyl.jpg)
작사가 한산도와 작곡가 백영호 콤비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 정통 트로트 넘버는 동아방송의 라디오드라마를 바탕으로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주제가로 녹음되었다. 김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인연을 맺은 섬처녀가 버림받고 술집에서 일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신파물이지만 이 음반의 B면 첫 트랙에 수록된 이미자의 이 노래는 말 그대로 전국을 뒤집어놓았다.
공식적인 기록이 전무하므로 정확한 판매량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어느 정도 확실하다. 이듬해 봄까지 이 음반은 3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왜색가요 시비로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 전까지 1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저그런 기록이겠지만 음반시장 자체가 열악했던 당시엔 3000장만 팔려도 ‘대박’이라 환호성을 지를 때였다.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이 10만 장의 벽을 깨뜨린 최초의 LP로 많은 관계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1994년 KBS창사특집 ‘빅쇼’ 무대에 함께 오른 이미자(왼쪽)와 패티김.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6/joongangsunday/20250426000201351eior.jpg)
‘동백아가씨’는 새로운 여왕의 대관식이었고 트로트가 주류 장르로서 제2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이미자의 거침없는 행보는 10년이 넘도록 흔들림없이 이어진다. 그는 지구라는 메이저 레이블을 통해 백영호와 해방 이후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히는 박춘석이라는 ‘투톱’ 작곡가와 상상을 초월하는 명곡 퍼레이드를 시전한다. 이 두 작곡가와만 900곡이 넘는 노래를 취입했고, 그밖에도 고봉산·박시춘·나화랑·이인권·김인배·손목인·홍현걸·남국인·손석우·김영광 등 당대를 아로새긴 대작곡가 군단이 이 영광의 시대를 함께했다. 그리고 트로트는 이미자 자신이 나중에 술회한대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1990년 기네스북 기록으로 이미자는 560장의 음반과 2069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물론 중복된 노래도 많고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기 어려운 구석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아네모네’ ‘그리움은 가슴마다’ (이상 작곡가 박춘석), ‘여자의 일생’ ‘아씨’ ‘서울이여 안녕’ ‘울어라 열풍아’ ‘여로’ ‘빙점’ (이상 백영호), ‘유달산아 말해다오’ ‘섬처녀’ (이상 고봉산) 등등, 빅히트곡만 족히 100곡이 넘는 이 어마어마한 리스트는 장르를 불문하고 그 어떤 경쟁자도 허용하지 않는 불멸의 금자탑임은 명백하다.
![‘동백아가씨’가 발표됐을 무렵의 이미자.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6/joongangsunday/20250426000202773lijv.jpg)
이미자는 정통 트로트 역사의 최후의 수문장이다. 깊고 단단한 그의 음색은 저역부터 고역까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맑고 강력하게 표현된다. 그의 발성은 장인이 예리한 칼로 아로새긴 것처럼 정확하게 듣는 이들의 귀와 가슴에 전달되고 그저 피상적인 감정이입을 강요하는 영혼없는 바이브레이션 따위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50년도 넘은 낡은 녹음인데도 지금 세대가 들으면 깜짝 놀란다. 그 어떤 녹음실의 기교도 없이 바위처럼 강인하고 강물처럼 유연한 그의 프레이징에 넋을 잃는다.
그와 그의 노래는 연인처럼 살갑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고통을 인내하며 가난한 집안을 지켜낸 누이의 나직한 음성과도 같다. 뒷산 소나무와 같은 한결같음이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를 지켜낸 것이다. 그의 데뷔 45주년을 기념하며 후배 장욱조가 헌정한 노래가 이렇게 담담하게 펼쳐진다. “내 영혼 노래가 되어 나는 살리라…”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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