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편곡…재즈냐 트로트냐는 번역가 몫” [.txt]

한겨레 2025. 4. 2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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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공장 소년에서 ‘장르소설 번역의 대가’로
‘여백을 번역하라’는 철학으로 100여 권 출간
“우리말 말 습관, 말멋 살린 번역이 좋은 번역”

‘장르소설 번역의 대가’로 꼽히는 조영학 번역가는 “이제 생계로서의 번역은 은퇴하고 나에게 재미가 있거나 의미가 있는 작품만 번역하게 될 것 같다”고 밝혔다.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 본사에서 조영학 번역가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고 있다.

번역가를 찾아서 l 조영학 번역가

2년 전 ‘장르 소설 번역의 대가’로 꼽히는 조영학 번역가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는 “이제 은퇴했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번역작이 계속 나왔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은퇴하셨다는데 왜 번역작이 계속 나오냐?”고 묻자 그는 “그게 출판사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라며 민망해했다.

‘저소득 전문직’으로 알려진 번역가란 직업이 그래도 지망생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100세 시대’에 종신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인터뷰석에 앉자마자 그에게 “남들은 은퇴 없이 일할 수 있다고 부러워하는 번역가를 왜 벌써 그만두려 하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아이들도 다 독립해서 부양의 의무가 없어졌고요. 제가 17살부터 공장 일을 했잖아요. 아내도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하고, 또 제 본업이 전업주부에다 농부라서 바쁘기도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지독한 가난,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새엄마의 아동 학대…. 열일곱의 그는 한살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전국을 전전하며 도금, 금은세공, 인쇄 일을 했다. 그러다 폐결핵에 걸려 매일 코피를 쏟거나 의식을 잃는 바람에 일을 그만둬야 했다. 스물다섯살,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유일하게 뭔가를 도모해 볼 수 있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어 보였다. 고졸 검정고시를 본 뒤 1년여 공부해서 한양대 4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영문학으로 석·박사까지 마친 뒤 시간강사를 했지만 재미가 없었고, 출판사에 입사했지만 출판사가 망해버렸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번역이었다.

처음 번역을 해보겠다며 찾아간 출판사에선 두권의 책을 주며 한권을 고르라고 했다. 하나는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소설이었고, 하나는 호러소설인 ‘고스트 스토리’였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스트 스토리’를 골랐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 처박혀서 호러, 스릴러, 탐정 소설만 읽었거든요. 상상력의 재미, 반전의 재미 때문에 좋아했죠. 그때 이런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하면서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한때는 스티븐 킹, 로버트 해리스, 존 르카레 등 유명 작가들을 전담했었고, ‘히스토리언’ ‘나는 전설이다’ 같은 베스트셀러도 펴냈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콘클라베’ ‘고스트 라이터’ ‘엑소시스트’ ‘미스트’ 등 영화 원작을 비롯해 100여권의 장르 소설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그가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배경에는 ‘여백을 번역하라’는 번역 철학이 있다. “번역이라는 게 영어라는 기호를 우리말이라는 기호로 옮기는 것인데, 우리말은 우리말 문법 체계 안에서 살아야 해요. 예를 들어, ‘To understand is to forgive’라는 문장을 번역한다고 봅시다. 일차적인 번역은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겠죠. 그런데 우리말은 명사절을 거의 쓰지 않아요. ‘이해해야 용서도 가능하다’는 조금 더 우리말 체계에 맞는 번역이겠죠. 하지만 가장 우리말에 맞는 번역은 ‘이해 없이 용서도 없다’가 되겠죠. 이렇게 우리가 쓰는 말 습관과 말멋, 글멋 같은 여백을 다 포함한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즉 기호에서 멀어질수록 의미와 가까워지고 표현은 단단해집니다.”

이에 따라 그는 번역이 ‘트랜스레이션’(옮김)이 아닌 ‘리라이팅’(다시 쓰기)라고 말한다. “번역이 원서에 종속된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고 봐요. 번역은 번역가의 끝없는 선택과 결정 끝에 나오는 결과물이라서, 같은 원서라도 번역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일종의 ‘편곡’과 같죠. 같은 원곡을 두고 누가 편곡하느냐에 따라서 재즈가 되기도 하고 트로트가 되기도 하잖아요.”

그에게 번역가라는 직업은 생계이기도 했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연결시킨 자아실현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의미는 행복으로 가는 다리였다는 점이다. 번역을 하게 되면서 교사로 일하는 아내를 대신해 지난 22년간 밥상을 차리고 살림을 도맡았다. “시간강사 하고 출판사 다닐 때는 집안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죠. 번역과 살림을 동시에 하면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됐어요. 아내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아이들에겐 ‘지상 최고의 아빠’라는 칭찬도 받으면서,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걸 느끼게 됐죠. 번역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거죠.”

자녀들은 독립했지만, 아직 일을 하는 아내를 위해 끼니를 챙기는 전업주부가 본업이고, 60평의 밭에서 감자, 콩, 마늘, 상추부터 고구마, 참외까지 키우는 게 부업이다. 하지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번역은 계속될 것 같다. “이제 생계로서의 번역은 은퇴하고, 저에게 재미가 있거나 의미가 있는 책만 하게 될 것 같아요.” 지금부터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책들은 장르소설 마니아인 그가 고르고 고른 책이라는 뜻이다. 앞으로 나오는 그의 번역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아서왕 연대기 1∼3

‘윈터 킹’ ‘에너미 오브 갓’ ‘엑스칼리버’로 이뤄진 3부작 소설이다. 영국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버나드 콘웰이 치밀한 고증과 자신만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판타지를 배제한 역사소설로 완성해 냈다. 조 번역가는 “번역했던 작가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교정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작품”이라고 귀띔했다.

버나드 콘웰, 랜덤하우스코리아(2009∼2011)

콘클라베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들의 비밀회의(콘클라베)를 둘러싼 권력의 미세한 이동과 미스터리를 섬세하게 그린 작품. 2016년 출간 당시부터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올해 개봉된 영화는 아카데미 등 각종 영화상 최다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조 번역가는 “책을 읽어도 영화와 같은 수준의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로버트 해리스, 알에이치코리아(2025)

자살의 전설

아버지의 자살을 겪은 저자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작품집으로, 회고록과 소설의 절묘한 만남을 통해 글쓰기의 치유력을 보여준다.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문학상을 12회 수상했다. 조 번역가는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글쓰기의 원형을 보여주는 책으로 나 또한 글쓰기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데이비드 밴, 아르테(2014)

먼 북쪽

근미래 소설로 종말 이후의 황폐한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자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고 고백하며 손수 일본어로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조 번역가는 “하루키가 추천할 만큼 정말 재미있는 종말 이야기”라고 평했다.

마르셀 서루, 사월의책(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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