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층간 소음’ 갈등 피하려 슬리퍼 신으며 조심하셨는데”

서울 관악구 봉천동 아파트 방화 사건 나흘이 지난 25일 낮, 검게 그을린 집에서 흰 안전모를 쓴 직원들이 잿더미가 된 살림살이를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방화 사건 피해자의 아들 정아무개(45)씨는 집에서 불에 그을려 이곳저곳이 헤진 파란 실내 슬리퍼를 들고 나왔다. 카메라 앞에 선 정씨가 슬리퍼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니가 층간소음 갈등이 생기고 신으셨던 슬리퍼입니다. 발소리, 퇴근하고 밥 해먹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아랫집에서 올라와서 소리를 최대한 안 내고 생활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날 봉천동 아파트 방화 화재가 발생한 집에서 잿더미가 된 가구를 반출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요청을 받은 용역업체 직원들이 타다 만 살림살이들을 집에서 꺼내 사다리차에 옮겼다. 지난 21일 60대 남성 ㄱ씨는 이전에 살았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 아파트에 찾아가 ‘층간 소음’ 갈등을 빚었던 집에 불을 질렀다. 대상이 된 401호 주민 ㄴ씨는 전신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이고, 그를 포함해 주민 10여명이 전신 화상과 낙상, 호흡곤란 등 중경상을 입었다. 방화한 ㄱ씨는 화재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 ㄴ씨 아들 정씨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어머니는 당시 4층에서 추락하셔서 현재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계신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구강에 산소 관을 삽입해 대화는 불가능한 상태”라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야 할 공간이 한순간에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이 되었다. 누구나 살면서 마찰은 생기지만, 그 마찰은 대화로 풀어가며 사는 게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정씨 설명을 들어보면, 그의 어머니는 홀로 집에 살며 식당에서 일했다. 일이 끝나고 밤에 집에 돌아와 밥을 차려 먹을 때면 아랫집에 사는 ㄱ씨가 시끄럽다고 항의해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지난해 추석에는 어머니 집에 명절을 보내러 온 정씨와 ㄱ씨가 층간소음 문제로 시비가 붙어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지난 21일 화재 현장에서 만난 같은 층 주민은 한겨레에 “(피해자는) 집에서 마늘 빻으면 밑에서 또 시끄럽다고 올라올까 봐 마늘도 못 빻던 사람이다. 밖으로 나가 계단 옆에서 빻고 그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들 정씨는 “가해자가 사망해 범행 동기가 뭔지, 우발적 범행인지 계획범죄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화재 당시 완강기와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다면 그나마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21일 관악소방서 관계자는 한겨레에 “아파트에 완강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는 설치되어 있었는데 (화재 시) 작동했는지는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1992년 소방법 개정으로 아파트에 완강기 설치가 의무화됐으나, 사고 현장과 같은 복도식 아파트에는 예외가 적용된다.
정씨는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법 개정도 부탁드린다. 사회 약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장종우 기자 whddn387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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