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동 화재로 잿더미 된 살림살이···피해자 아들 “완강기·스프링클러 있었다면···”[현장]
서울 관악구 봉천동 아파트 방화 사건으로 불에 타버린 집기들이 화재발생 나흘만인 25일 정리돼 나왔다. 피해자 A씨의 가족은 A씨가 신던 슬리퍼를 공개하며 “층간 소음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9시쯤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요청을 받은 용역업체 직원들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된 가구·조리도구 등을 대형 사다리차를 이용해 바깥으로 꺼냈다. 마스크와 헬멧을 쓰고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은 재가 된 쓰레기 더미를 밟고 서서 사다리차에서 내려오는 집기류를 트럭으로 옮겼다.
화재가 발생했던 아파트 4층의 두 집 내부는 각각 모두 천장부터 바닥까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직원들이 삽으로 불에 탄 벽지를 제거하자 분진이 날렸다. 불길을 잡으려 뿌렸던 물이 집안 곳곳에서 흘러내리기도 했다. 냉장고는 뜨거운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찌그러져 있었다. 바닥에서는 김칫국물, 얼음 등이 녹은 물이 흘러 내려 시큼한 냄새가 났다.
A씨가 키우던 화분은 검게 줄기만 남아있었다. 옷장 겉면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검게 갈라져 있었다.
피해자 B씨의 가족·친척은 이날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SH 측은 “B씨는 직계 가족이 없다”고 말했다.
B씨와 용의자 C씨의 관계는 이날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동에 사는 한 주민은 “B씨가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하시다가 봉변을 당한 게 아닌가 싶다”며 “주민 중 날씨가 좋아지면 문을 열어두고 지내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같은 층 주민 김모씨(76)도 “용의자가 열린 문을 잡고 서 있던 것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은 정리되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여전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4층에 사는 김모씨(73)는 지난 21일 폭발음이 들린 뒤 황급히 대피하던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일요일까지 구청에서 빌려준 호텔에서 자고 있다”며 “무서워서 집에서 잠도 못 자겠고, 정리하는 곳도 들여다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주민 D씨는 지난 21일 오전 8시에 산책을 나왔다가 화재 현장을 목격했다. A씨가 창문으로 추락하는 모습도 봤다. D씨는 “폭발할 때 유리창이 깨지면서 조각이 산책하던 곳 바로 옆까지 튀었다”며 “운이 좋아서 살았다”고 말했다.
A씨의 둘째 아들 정모씨는 이날 A씨가 집에서 사용하던 슬리퍼를 언론에 공개했다. 슬리퍼는 듬성듬성 해져 있었다. A씨는 용의자 C씨와 잦은 층간소음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9월 추석쯤에는 명절을 함께 보내러 왔던 A씨 가족과 갈등도 벌였다. 정씨는 “어머니가 슬리퍼를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며 “추석 때 집에 갔을 때도 ‘밑에 층에서 올라올 수 있으니 너희도 조심히 다녀라’라고 말했었다”고 전했다.
정씨는 A씨가 의식을 회복했다고 전했다. 다만 A씨는 입에 공기관이 삽입돼 대화가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정씨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야 할 공간이 하루아침에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이 됐다”며 “완강기, 스프링클러가 있었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필요하다면 법 개정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이어 “사회 약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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