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안에 숨어있었네, 추억 가득 경춘선 가는 길
서울시 노원구 경춘선 숲길

철길은 멈췄지만, 그 위를 걷는 발걸음은 이어진다.
경춘선 숲길은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로 위에, 사람들의 시간과 기억이 흐르는 길이다. 열차의 덜컹거림 대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그 자리를 채운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서울과 춘천을 오간 경춘선은 2011년 12월20일 오후 11시40분, 청량리발 춘천행 무궁화호 1873호 열차가 남춘천역에 도착하면서, 1939년부터 이어져 온 긴 여정의 막을 내렸다. ‘엠티 가는 열차’로 불리며 대학생들의 낭만을 실어 나르던 기차는 사라졌지만,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추억을 그리워했고, 도시는 그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늦겨울의 서늘함이 남아 있던 지난 3월 말 서울시 중랑구와 노원구 인근 경춘선 숲길을 걸었다. 경춘선 숲길은 폐선된 뒤 쓰레기장으로 방치됐다가, 경춘선 폐선부지를 활용한 숲길 조성 사업을 시작으로 2018년 완공됐다. 총 6㎞ 길이로 월계역~공릉동 과학기술대학교 1구간(1.2㎞), 행복주택공릉지구~공릉동 육사삼거리 2구간(1.9㎞), 옛 화랑대역~담터마을 3구간(3㎞),으로 나뉘어 있다.
전체 숲길을 걷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월계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갔다. 서울 연지초등학교를 정면에 두고 오른쪽 도로를 따라 10여분 걸으면 아파트 단지와 녹천중학교가 나온다.
여기서 잠깐 헷갈린다. 철길 대신 성원아파트 단지가 보이기 때문인데, 의심을 접어두고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걷다 보면 경춘선 숲길 알림판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철길이 펼쳐진다.
경춘선 숲길은 철길과 돌길, 짚길 등이 나란히 한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날 발바닥 컨디션에 따라 고르면 된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나 고령층은 맨 왼쪽에 깔려 있는 맨드르르한 타일 길을 이용할 수 있다. 모든 구간이 평지인데다 ‘무장애 길’이 별도로 있어 노약자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철길에 들어서니, 대여섯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선로 위를 걸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선로 위에 뒤따라 올랐지만 이내 기우뚱 떨어지고 말았다. 양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려 애써도 다섯 걸음 더 걸었을 뿐이다. 연인과 함께라면 손을 잡고 선로 위를 걸어봄 직하다.
2~3분쯤 걸었을까. 경춘철교가 눈앞에 펼쳐진다.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노원구 월계동과 공릉동을 연결하는 폭 6미터 길이 176.5미터 철교다. 1939년 7월 건설됐다.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전철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광운대역(옛 성북역)에서 갈매역 8.5㎞ 구간이 폐선되기까지 71년동안 경춘철교를 통해 열차가 서울과 춘천을 오갔다. 철교 아래로 흐르는 중랑천이 흐르고, 시야가 탁 트인다.
경춘선 숲길의 매력은 사람이다. 경춘선 철길은 본디 주택가를 달렸다. 이 때문에 지금도 길 양쪽으로 주택들이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중랑천에서, 골목에서 쉽게 이어진다. 삶터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철길에선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성, 근력 운동을 하는 중년 남성, 유아차를 미는 부모, 단체 에어로빅하는 사람들, 바둑을 두는 노인 등을 마주할 수 있다.


2구간에 들어서면 철길 양쪽으로 작은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일명 공리단길로 불리는 이곳에선 5월이면 ‘경춘선 공릉숲길 커피축제’를 연다. 올해는 다음달 9일과 10일 이틀동안 지하철 7호선 공릉역 앞 4차로 구간에서 열린다.
자칫 방치될 수도 있는 벽에는 열차와 관련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도 한 장 찍고 천천히 걷다 보니 허기가 졌다. 때마침 공릉동 도깨비시장이 눈에 보여 잠시 경로를 이탈했다. 철길 바로 옆 계단을 열 개 정도 오르니, 시장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걷는 이들이 배를 채울 수 있는 떡볶이, 호떡 등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호떡 하나를 입에 물곤 다시 길을 걸었다.
공릉동 도깨비시장과 빌라·다가구 주택을 지나면 어느새 넓은 녹지와 고층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다. 도심의 복잡함과 여유가 동시에 공존하는 이 공간은 서울의 단면을 압축해 보여준다. 도로가 들어선 곳은 종종 선로가 끊어지기도 하는데 기찻길 신호등 모양 때문에 선로가 끊어졌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경춘선 숲길 따라 스피커가 설치돼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12시~4시, 오후 6시~8시 ‘노원 음악방송’이 나온다. 나즈막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보행자의 발걸음 소리가 꽤 조화롭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나와 육군사관학교 쪽으로 향하면, 옛 화랑대역과 화랑대 철도공원이 있는 3구간을 만난다. 철도공원에는 1899년 당시 개통됐던 대한제국 최초 전차와 1950년대 운행됐던 좁은 궤간의 협궤열차 등이 전시돼 있다. 철도공원의 열차 내부 관람은 화요일~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개방된다. 월요일은 휴무지만 외부 관람은 가능하다.
옛 화랑대역은 2010년까지 육군사관학교 앞 경춘선의 간이역이었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소박하고 고즈넉한 멋이 있다. 1939년 건립 당시 원형이 잘 보존돼 2006년 등록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됐다.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다. 옛 화랑대역사 바로 앞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있다. 학교 내에서 생도들이 구호를 붙이며 달렸다. 때가 때인지라 학교를 바라보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경춘선 숲길 2구간 중반까지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며 걷고 싶다면 6호선 화랑대역에서 내려 3구간을 걷는 편이 좋다. 철도공원을 지나면 걷는 인원이 현저히 줄어들고, 양쪽으로 나무숲이 들어서 도시의 소음도 잠시 차단된다. 빠르게 흐르는 세상에서 천천히 걸어도 좋은 곳, 아니 천천히 걸어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슬슬 약 40~50분 걸으면 경춘선 숲길 종점이다.

경춘선 종점 인근에 버스 정류장은 없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인 태릉선수촌까지 가려면 1.5㎞ 걸어나가야 한다. 오래 걸을 계획이라면 발이 편한 운동화를 신는 편이 좋다. 2시간이면 기차는 멈춘 철로를 걸으며, 기억으로 진입할 수 있다.
글∙사진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속보] 검찰, 김건희 ‘도이치 무혐의’ 재수사…서울고검이 직접 맡는다
- [속보] 문 전 대통령 ‘옛 사위 특채’ 의혹 사건, 중앙지법 형사21부 배당
- [영상] 바티칸서 만난 유흥식 추기경 “교황, 한국 계엄 걱정하셨다”
- [단독] 이재명 항소심 재판부, 대법원 최신판례로 무죄 선고했다
- ‘문재인 사위 월급=뇌물’ 기소, 검찰은 이게 통한다고 보는가? [뉴스뷰리핑]
- [속보] 서울 코엑스 내부 화재…소방당국 진압 중
- “심신쇠약이라…” 김건희, 국회 청문회 안 나온다
- 홍준표 “한동훈 참 못된 사람”…‘김문수 전과자’ 발언 직격
- 문 전 대통령 ‘관여’ 못 밝힌 채…‘이스타 특혜 채용=뇌물’ 단정
- 윤석열보다 문재인이 수돗물 많이 썼다?…윤건영 “치졸한 말장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