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부터 여성 삭제까지… ‘내란 종식’만 하자는 21대 대선

손고운 기자 2025. 4. 2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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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이재명 캠프 여성공약 ‘뒷전’·국민의힘 후보들은 ‘여성 공격’
한겨레21 설문 응답자 97.7% “여성정치 입지, 여전히 좁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025년 4월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비전 선포식 및 캠프 일정 발표\'에서 캠프 인선을 소개하고 있다. 김경호 한겨레 선임기자

6·3 조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에서 ‘여성’이 지워지고 있다. 거대 양당 소속 남성 후보들의 말과 공약에서 ‘여성’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유력 대선주자 캠프에서 여성 정책을 짜는 인력이 보이지 않는다. 한겨레21 취재 결과 ‘선거판에 유리한 고지 선점’을 위해 여성을 외면하는 정황이 포착됐다. ‘여성 정치’의 삭제다.

이재명 후보 싱크탱크 주요 여성 보직자 5명

최근 양당에선 성평등 추락과 관련한 몇 개 장면이 화제가 됐다. 첫 번째는 2025년 4월16일 출범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의 정책 전문가 집단(싱크탱크) ‘성장과통합’에 공동대표를 제외한 주요 분과위원장 30여 명이 남성으로 채워진 조직도였다. 이 후보 지지율이 50.2%에 이른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4월16~18일 리얼미터) ‘예비 내각’이란 수식어가 뒤따르는 싱크탱크에 주요 보직자 65명 가운데 여성은 5명(7.7%)에 불과했다. 상임고문단 6명도 전부 남성이었다. 34개 분과위원회 중 여성 정책을 다루는 별도의 분과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직도 공개 뒤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성장과통합 쪽은 “의도하진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취재 결과 출범 전부터 기울어진 성비·여성 정책 뒷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안팎에서 이어졌는데도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후보의 싱크탱크는 차기 정부 비전과 정책 청사진을 그리는 공간으로, 정책 설계 초기 단계에서 ‘여성의 삶과 경험’이 반영되지 않으면 여성의 공적 참여가 구조적으로 제한되고 성평등을 고려한 정책 입안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2022년 대선에서 디지털성범죄 집단 엔(n)번방의 실체를 밝힌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씨를 캠프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겸 디지털성범죄근절특별위원장으로 내세워 ‘2030 여성 표심 잡기’에 나섰던 이재명 캠프는 이번 대선에선 아직 캠프 내 여성위원회나 여성 공약 담당자도 없는 상황이다.

\'추적단 불꽃\' 활동가 출신인 박지현 디지털성범죄 특별위원장이 2022년 3월8일 서울시 마포구 홍대 걷고싶은거리 광장무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마지막 유세에서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또 다른 장면은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4월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여성인 뉴스타파 기자의 손목을 잡고 수십 미터를 끌고 가는 영상이었다. 기자가 “국민의힘이 ‘국민께 죄송하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무엇이 죄송한 것이냐”고 묻자 권 원내대표는 “뉴스타파는 찌라시” “의원회관 출입 금지 조치를 하라”고 말하며 언론사 기자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했다. 뉴스타파가 공개한 당시 영상을 보면 기자의 손목에 벌건 자국이 남았을 정도라 크게 논란이 일었다.

홍준표·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는 ‘여성 의제 공격’에 앞장서고 있다. 홍 후보는 “극단적인 페미니즘(Feminism)을 주장하는 피시(PC, 정치적 올바름)주의에 맞서 ‘건강한 가정이 해답이다’라는 ‘패밀리즘’(Familism)을 확산시키겠다”며 성평등 의제에 ‘극단’이란 이미지 덧씌우기에 나섰다. 김 후보는 캠프에 ‘여성 안심귀갓길’을 없앤 것을 성과로 홍보해 ‘여성 지우기’ 논란을 일으켰고, “바꿀 수 없는 걸 바꿔달라고 징징대는 게 페미니스트의 특징” 등과 같은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은 최인호 관악구의원을 청년본부장으로 영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 여성단체들이 필요성을 호소해온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 “억울한 사람을 많이 만들 수 있다.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형법상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에선 술과 약물을 이용한 속임, 직장 내 위계, 친족 관계 등에서 발생한 경우 등 강간 피해자 구제에 사각지대가 많아 ‘비동의 강간죄’ 도입의 필요성을 여성단체들이 주장해왔다. 미국 일부 주와 영국·독일·스웨덴·캐나다·일본 등은 이미 도입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가 그랬듯 ‘여성가족부 폐지’를 정부 부처 개편 공약으로 내놨다.

96.4% “여성 정치인 자리 여전히 ‘협소’”

한겨레21이 여성 정치에 관심을 가진 517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벌인 결과 97.7%가 정치 영역에서 여성 정치의 입지가 ‘여전히 좁거나(381명) 예전보다 더 좁아지고 있다(115명)’고 응답했다.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이재명 후보의 싱크탱크 주요 인물에 여성이 거의 없는 점, ‘비동의 강간죄’ 추진에 소극적인 국회 모습, 여성혐오에 대해 급격히 말을 꺼리는 분위기, 선거 때마다 너무도 적은 여성 공천 수와 정치인 수 등을 대표적 근거로 꼽았다. 이들은 ‘원래도 입지가 좁았는데 이제 소멸할 지경’ ‘이제는 의도적으로 ‘없는 셈’치고 삭제되는 중’ 등과 같은 의견을 냈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 여성 정치인의 자리에 대해 27.9%는 ‘아예 없다’, 68.5%는 ‘매우 협소하다’고 응답해, 이 역시 부정적 응답이 96.4%에 이르렀다.

이번 조기 대선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하고 실제 부처를 약화하는 것부터 실천에 옮겼던 윤석열 정부 집권 이후 치러지는 선거다. 윤 정부 집권 1년여 만에 우리나라 성평등 수준을 보여주는 ‘국가성평등지수’는 사상 처음으로 하락했다. 여성가족부는 2025년 4월17일 2023년 국가성평등지수가 65.4점으로 전년(66.2점)보다 낮아졌다고 밝혔다. 국가성평등지수가 후퇴한 건 발표를 시작한 2010년 이후 처음인데, 특히 전년에 견줘 감소폭이 가장 큰 지표가 ‘가족 내 성별 역할 고정관념’ 인식 수준(60.1점→43.7점)이었다. ‘경제적 부양 및 가족의 의사결정은 남성이 하고 가사·가족 돌봄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에 동의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이 문제는 국가의 인구 정책, 노동시장 구조, 경제성장 전략과도 직결된 요소라 차기 정부의 관심과 의지가 중요하지만, 성평등 의제를 주요 공약으로 전면화하는 캠프는 민주당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김동연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비동의 강간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한 정도만 있다.

실제로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2022년 대선 때 이재명 후보 캠프에서 공약 업무를 맡았던 민주당 관계자는 “윤 전 대통령 탄핵 인용 이후 캠프에 정책본부가 구성됐는데, 아직 여성 공약 담당자는 따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고 내부 상황을 전했다. 현 캠프에서 일하고 있는 민주당 관계자도 싱크탱크 주요 인사가 공동대표를 제외하면 대부분 남성인 것에 대해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개선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박지현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 대선 때보다 심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때는 캠프 내 여성위원회라도 꾸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여성위원회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캠프에서는 특정 성별을 내세우지 말라는 외부 컨설팅 결과를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22년 5월21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미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한 윤 전 대통령에게 성평등 향상을 위해 행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묻자, 7초간 침묵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명, ‘2030 여성 유권자’ 관련 질문 회피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있었다. 4월11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이재명 후보 비전 발표 기자회견에서였다. 이재명 후보는 오마이뉴스 기자가 “후보가 생각하는 내란 종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여쭙고 싶다. ‘빛의 혁명’을 언급해주셨는데,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서 집회를 주도했던 2030 여성들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 같다.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비전 발표하시는 자리니까 2030 여성 유권자를 위한 비전은 어떻게 구상하고 계신지 두 가지 여쭙는다”고 묻자 “하나만 하시죠. 첫 번째 내란은 어떻게 종식되는가? (후략)”라며 말을 돌렸다. 특히 “빛의 혁명 과정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했죠. 국민들이라고 하는 거대공동체 모두의 성과이고, 모든 국민과 함께 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라며 질문의 초점을 바꿨다.

민주당 내부에선 ‘내란 종식 의제가 흐려질 우려’ ‘이준석 후보 등이 만든 남녀 갈라치기 구도에 휘말릴 우려’ ‘윤석열 탄핵에 찬성한 중도층 남성 표심을 잃을 우려’ 등이 적극적으로 제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재명 후보의 중도층 지지율이 40%대를 보이는 상황에서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10여 년간 민주당에서 일한 한 보좌진은 “당내 분위기는 지난 대선 때와 달리 여성 의제에 대해 입을 뗄 수 없는 분위기”라며 “이미 민주당에 2030 여성은 잡은 물고기다. 어쨌든 민주당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 같은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2030 여성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만한 대체재가 없단 걸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수의 이재명 캠프 관계자는 한겨레21에 ‘지금은 조기 대선 경선 국면이고, 본선에 가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에 엄연히 전국여성위원회가 있고 지난 대선 때 캠프에서 만든 여성 관련 공약들이 있는 만큼 지난 공약집에 있던 “임금·채용 등 성차별과 성희롱 없는 공정하고 안전한 일터” “스토킹·데이트폭력 등 젠더폭력 처벌과 피해자 보호 대폭 강화” “사회 전반의 동등한 성별 대표성과 균형 있는 참여” 등의 내용이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란 취지였다.

하지만 ‘성장과통합’이란 싱크탱크를 꾸리는 동안 ‘여성 전문가’ 영입이나 여성 정책을 짜는 단위가 후순위로 밀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사이 보수 정당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반발성 공격)를 정치적 자양분으로 이용하고 있다. 제21대 국회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 장혜영·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국회에서 사라졌지만, ‘반페미니즘’ 유권자를 지지층으로 삼는 이준석 후보는 오히려 제22대 국회에 입성했다. 진보 정당이 원외로 밀려난 상황에서 민주당마저 여성 의제에 침묵하면 여성 유권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가 2025년 4월21일 세종 성금교차로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등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 개편안을 공약하자, 김재연 진보당 대선후보는 “리틀 윤석열이냐”며 “성별 임금격차는 여전히 OECD 최고 수준이고, 여성의 경력단절과 노동시장 차별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딥페이크를 포함한 신종 디지털 성범죄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민주당 내 ‘이준석 프레임’ 공포 짙어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대선 캠페인은 캠페인이고 이후 (성평등) 정책을 추진하면 된다는 얘기를 하는 이들도 있는데, 철학적으로 (대선 캠프 내에) 쌓이지 않으면 캠페인 이후에도 정책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며 “22대 국회가 시작될 때부터 계엄 직전까지 성폭력 정책과 법안들 때문에 여러 의원실을 만나고 다녔는데, 확실히 너무 많은 의원실과 보좌진이 남초 커뮤니티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더라”라고 말했다. 특히 “(국회 내에서) 이준석 후보 얘기를 너무 많이들 했다”며 “그가 ‘젠더 갈라치기’라는 정치권발 선동을 쓰고 있고 그 자체가 프레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많이 인식한 것 같았는데 정치권에서 이준석 후보가 과대 대표되고 있었고, 정치인들 스스로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요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 정말 큰 문제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국회의 한 행사에선 이런 분위기가 감지됐다. 4월15일 국회도서관에서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란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연희 민주당 의원은 축사에서 “여러 가지로 많은 반대 의견도 있고 그런 사정이 있었다. 여성단체에서도 이 행사를 준비하는 데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토론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단 취지로 이야기했다. 전진숙 민주당 의원도 이 자리에서 “대선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큰 흐름을 앞두고 있다보니 우리 이연희 의원님은 아마 여러 가지로 조금 압박도 받으시고”라며 “국회에서 정말 많은 (항의) 문자와 에스엔에스(SNS)에 댓글 폭탄을 당하는 경우가 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이 이야기할 것은 해야 되고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공보국장과 여성국장을 지낸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도 “17대 국회에서부터 당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부부강간죄 문제와 비동의강간죄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정춘생 혁신당 의원, 정혜경 진보당 의원은 “(법안 발의에 필요한 의원 최소 숫자인) 10명을 채우지 못해서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형법 개정안) 발의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회주의적으로 ‘성평등’ 써먹는 정치

이 후보는 2017년 대선 경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땐 성평등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피력했다. 2017년 3월 여성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성평등 대통령이 되겠다”며 “캐나다와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의 의지로 여성 장관을 50% 임명했다. 저는 대통령이 추천하고 임명하는 내각과 기관장에 여성 인재를 적극 기용하고, 국무위원과 고위공무원단을 남녀 동수로 구성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확대하겠다. 청와대와 내각부터 성평등을 실현해 임기 초 30%에서 시작해 임기 중 남녀 동수 내각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이 후보가 출마를 선언한 2025년 4월10일부터 4월23일까지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공식 석상 발언을 전부 분석한 결과 ‘여성’ ‘젠더’ ‘성평등’ 등의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두 달 뒤쯤 ‘여성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금 시점에서도 이 지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계엄 이후) 광장의 2030 여성들을 호명하고 상찬했는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광장의 시간’이 끝나고, ‘선거의 시간’ ‘정치의 시간’이 시작되면서 완전히 또 예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수경 민주노총 정책국장(성평등위원회 담당)도 “정치권에서 여성을 거론하는 것은 낡은 것처럼 여긴다”며 “광장을 이야기하며 2030 여성을 소환하지만 기대는 없고 주변부로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페미니즘 의제를 제시하는 후보가 나타나야 한다. 광장에 참여한 많은 여성의 정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4월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주최로 열린 ‘모두의 성평등 다시 만난 세계’ 집담회에선 이런 불만이 터져나왔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집담회의 부제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이라며 “계엄 사태 이후 지난 몇 달간 광장과 거리의 중심엔 청년 여성들이 있었다. 단지 반민주적인 정치권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좀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렇기 때문에 이번 조기 대선에 임하는 정당이나 후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겁고 더 진지하게 그들의 목소리와 의제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꼬집어 비판했다.

김동연 제21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와 간담회 참가자들이 2025년 4월21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모두의 성평등, 다시 만난 세계’ 여성간담회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여성정책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명진 기자

성평등 의제 전면화 바라는 유권자들

이 집담회에선 성평등 의제 전면화를 바라는 유권자들이 목소리를 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활동가’로 자신을 소개한 한 유권자는 “(윤 정부가 공약으로 내세웠던)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이후로 제대로 된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여가부에 대해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며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의 설치로 성평등 정책 추진 체계가 확립되고 현장 단체들의 의견이 반영된 정책이 세워질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여가부 기능 확대, 그에 따른 예산 수립에 힘써달라”고 말했다.

한 동덕여대 재학생은 “학교 쪽의 비민주적 행정 비판과 여대 존속을 위해 공학 전환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많은 사회적 비난과 공격을 당할 줄 그 누구도 몰랐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정치권까지 그 공격에 가담한 것”이라며 “정치권이 동덕여대 사안을 ‘남녀 갈라치기를 부추긴다’고 왜곡하고 외면하는 동안 학생들은 온라인에 신상이 유포돼 모욕, 성희롱, 살해 협박을 받았다. 정치권이 더는 여성이란 이유로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테러를 방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집담회에 참석한 정춘숙 전 민주당 의원은 “지난번에 굉장히 안타까웠던 게 민주당에서 기자회견을 같이 해주기로 했다가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추운 날씨에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던 (동덕여대 학생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여대가 공학 되는 걸 반대한다’ 그런 개념이 아닌데 (사실 사람들이) 이 (집회)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참석자는 “(한 정당이 지지율) 상황이 좋으면 압도적 승리를 해야 해서 여성 이슈와 같이 민감한 건 꺼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상황이 안 좋으면 어떻게든 따라잡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이슈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반복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추진해야 할 여성 의제는 산적해 있다. 적어도 대선 주자들에게 ‘성평등 임금공시 민간 확대’ ‘마미트랙(가족 돌봄을 주로 부담하면서 출퇴근 시간은 조절할 수 있되 승진 기회는 적어지는 여성 취업 형태) 페널티를 비롯한 저출생 대책’ ‘디지털성범죄 방지 및 처벌’ ‘차별금지법 발의’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선고한 이후 낙태 관련 입법 방향’ 등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여성 의제들은 저출생, 노동시장, 고령화 사회 돌봄 이슈 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정치·경제·사회 분야 공약들을 발표하면서 ‘여성의 삶과 경험’을 의제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통계청 국가통계연구원이 3월24일 발표한 ‘한국의 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현황 2025’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2024년 기준)은 2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네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이마저도 비례대표 의원이 주를 이루고 당 지도부는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돼 여성은 정치권에서 과소 대표되고 ‘정치 의제화’는 힘든 상황이다.

5월10일 ‘성평등 정치’ 촉구 여성 대행진

정춘숙 전 민주당 의원은 집담회에서 “사회적으로 안티페미니즘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에게 당신이 언제 어떻게 이렇게 약속했는데 왜 지키지 않았느냐 계속 물어야 한다. 돌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4월24일 “광장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낸 조기 대선임에도, 유력 정당의 정책 방향에서 ‘여성’, ‘성평등’ 함구령이 내려지고 있다”며 “성평등을 삭제하며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지 말라”고 성명을 냈다. 현재 여성계는 ‘성평등 정치로 가는 페미니스트 공동행동’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5월10일에는 서울 용산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차별과 혐오 선동 정치에서 성평등 정치로!”라는 구호를 내건 여성 대행진에 나설 예정이다.

손고운·임지선·오세진·신다은·서혜미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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