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 과정 낱낱이 밝혀야"…조기 대선 국면 커지는 목소리

연일 대선 경선 후보들이 연구개발(R&D) 예산 증대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지난 정부의 R&D 예산 삭감 정책으로 위축된 과학계 표심을 잡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올 6월 새 정부가 출범해도 R&D 예산 삭감이 과학계에 남긴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을 전망이다.
안철수·한동훈 국민의힘 경선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 등은 지난 21일 과학의 날을 맞이해 과학정책비전을 발표하며 R&D 투자 확대를 약속했다.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대해 여야를 막론한 모든 대선 경선 주자들이 잘못됐다고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과는 별개로 R&D 예산 삭감이 과학기술계에 남긴 상흔은 여전히 남아있다. 연구자들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단행한 R&D 예산 삭감 과정이 과학기술인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비판한다. 과학 석학 A씨는 "당시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표를 얻기 위해 보건복지부, 국토교통부 등 예산을 늘렸지만 예산을 줄일 곳이 없어 만만한 과학기술계 예산을 줄였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견이 나오는 이유는 2024년도 R&D 예산을 삭감하는 과정이 급작스럽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한 마디로 R&D 예산 삭감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2023년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 전 대통령은 “나눠 먹기식 갈라 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2024년도 R&D 예산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통상 과기정통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는 3~4개월 동안 내년도 예산 배분·조정안을 준비한다. 이후 확정된 예산 배분·조정안을 법정기한인 6월 30일까지 기획재정부에 제출한다. 법정기한 2일을 남기고 다시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법정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과기정통부는 예산 배분·조정안 재검토에 들어갔다
재검토 2개월 만인 2023년 8월 과기정통부는 다급하게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예산안을 내놓는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2024년도 주요 R&D 예산안을 전년 대비 13.9% 줄인 21조5000억원으로 의결했다. 과기정통부의 R&D 예산 삭감 정책에 연구 현장을 비롯한 과기정통부도 큰 혼란을 겪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R&D 예산 방향이 갑작스럽게 바뀌며 과기정통부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굉장히 컸다"고 말했다.
당시 R&D 예산 삭감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 정부가 과학계 '카르텔'을 지적하며 논란에 불을 붙였다. 2023년 12월 조성경 전 과기정통부 1차관은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해 특정 연구와 기관 사례를 들어가며 R&D 카르텔의 정의와 8가지 사례를 언급했다. 지금까지 과기정통부는 과학기술계를 카르텔로 지목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줄곧 밝혀왔지만 정부 인사가 과학기술계 카르텔 사례를 구체적으로 처음 지목한 것이다.
주영창 전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도 2023년 9월 R&D 예산 삭감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R&D 현장 일부에 '카르텔적' 요소가 있다"며 "전체가 카르텔이라는 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고 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는 "정부가 카르텔 집단으로 몰아가며 과학기술계가 뼈 아픈 기억을 갖게 만들었다"며 "이에 대해 대통령을 포함해서 정부 관계자들이 사과를 하거나 유감 표명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다"며 과학기술인의 명예는 반드시 회복돼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R&D 예산 삭감은 과학기술계 내부 갈등마저 일으켰다. R&D 예산 삭감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그리고 삭감된 R&D 예산안을 의결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등을 향한 과학자들의 비판이 여전히 거세다. 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같은 정책 연구기관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A 씨는 "2023년 어떤 계기와 과정을 통해 R&D 예산 삭감이 이뤄졌는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R&D 예산 삭감을 왜 막지 못했는지, 왜 대통령이 R&D를 나눠 먹기식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게 됐는지 등이 낱낱이 밝혀져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R&D 예산 삭감은 기초연구의 명맥을 끊기게 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2024년 R&D 예산에는 신진 연구자를 지원하는 '생애 첫 연구(3000만 원 내외)'와 소액 과제인 '기본연구(5000만~8000만 원 내외)'가 사라졌다. 또 다른 과학 석학 B 씨는 "기초과학의 토양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비판했다.
올해 R&D 예산의 허점에 대해서도 지적이 있다. 이 교수는 "정부는 올해 R&D 예산을 전년도 예산으로 복원했다고 밝혔지만 대부분 글로벌 R&D 연구협력에 집중돼 예산이 증가한 것이라 국내 연구 현장의 예산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미국 중심의 글로벌 R&D에만 약 3조원을 투입할 정도로 정부가 미국에 집중했지만 돌아온 것은 '민감국가 지정'"이라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R&D 예산을 대폭 줄이는 등 미국 과학계가 전처럼 연구를 이어갈 가능성이 적어 무분별한 국제공동연구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 바이오 분야 대학교수는 "중국의 R&D 투자가 규모 면에서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대선 경선 후보들이 R&D 예산 확대를 언급하는 것은 긍정적이다"면서도 "젊은 연구자들이 국내에서 10년 뒤, 20년 뒤를 구체적으로 꿈꿀 수 있는 롤모델이 마련될 수 있도록 과학 정책이 확실하게 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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