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③-괌 마라톤] '기술'을 믿지 말고 '길'을 믿어라…두려움을 떨치는 '인생의 교훈'
새벽에 달리는 괌 마라톤은 몇km를 현재 달리고 있는지 알 길이 막막했다. 도로에는 달린 거리를 알려주는 지표가 없었다. 러너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오로지 반환점을 돌고 지시대로 완주하면 그게 하프 마라톤, 즉 21.0975km를 완주하는 셈이다. 이미 그런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놨는데도, 막상 달리다 보니, 현장이 그리 미덥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친절한 해설과 비교해서 생긴 불만 같았다.
마라톤을 뛸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스마트워치를 이용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어폰에 담긴 음악을 듣기 위한 시작 버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스마트 워치 운동 앱도 가볍게 터치했다.
첫 1km를 지나자, 워치는 내게 4분 30초라고 일러줬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렇게 빨리 뛸 리가 없었기 때문. "공식 대회여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나는 건가?" 알 수 없는 흐뭇한 표정을 무기 삼아 내리 전진했다.
하지만 워치가 10km 거리를 알려주면서도 여전히 평균 속도 4분대를 얘기하는 걸 듣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앱(App) 대로라면 내 눈앞에 반환점이 보여야 할 테고, 기록도 4분대가 아닌 (지친 거리가 있었을 테니) 5분대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여기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반환점이 보인 건 앱이 14km라고 말할 때였다. 반환점을 돌고 나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렇게 격차가 심하게 나는 거지?" 한국에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거리 차였다. 그렇게 이해가 안 가는 '팩트 불일치'에 대한 생각이 점점 불안으로 번지면서 "혹시 20킬로미터(km)가 아닌 20마일(mile)?" 하는 상상까지 도달했다.
앱상으로만 보면 앞으로 7km를 달려야 하고, 이 반환점이 만약 10km라면 앞으로 10여km를 더 달려야 할 테고, 만약 mile로 계산된다면 앞으로 15km 이상은 더 달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하면서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그렇게 불안을 안고 달리다 앱이 21km라고 명확히 알려주자, 나는 이 지점에서 왔던 길과는 다른, 어딘가 방향을 트는 지름길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야 계산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던 길 그대로 방향은 계속됐다. 나와 옆에서 비등하게 달리던 아랍에서 온 러너처럼 보이는 이에게 "우리 가는 방향 맞나요? 21km가 아닌 21mile 가는 거 아닌가요?" 여러 번 물었지만, 말할 힘조차 없어 보이던 그는 연신 고개만 떨구고 마냥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한 2km를 더 가니, 주변에 응원하던 현지인이 "앞으로 5km"라고 알려줬다. "벌써 다 온 줄 알았는데, 5km 더 가야 한다고?"
도로 표지가 없어 오로지 스마트 워치만 믿고 온 나는 온전히 '계산 착오'로 나름의 페이스를 순간 잃었다. 다리는 점점 풀리기 시작했고, 호흡은 가빠졌다. 심지어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듯 도돌이표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들면서 저장된 에너지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날려버릴 만큼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절박함에 뛰는 행위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최고 기록이 30km였던 적이 있으니, 그만두더라도 그 정도만이라도 뛰고 멈추자고 다짐했다.
마지막 오르막길 3km까지 겨우 채우고 피니스 라인을 통과하니, 스마트 워치는 28km라고 알려줬다. 워치 기록으로 30km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프 마라톤(21km)에 대한 불신의 극복 차원에서 오기로 뛴 것일까.
반환점을 돌기까지는 어떠한 불신도 공포도 없었다. 비록 10km의 '진실'과 14km의 '거짓'이 기 싸움을 벌였지만, 그때만 해도 별것 아닌 양 넘어갈 수 있었다. 공포는 20km라고 알려주는 워치의 신호가 다가올수록 거세졌다. 거리가 길어지고 목표와 멀어질수록 나는 '길'이 아닌 '기술'에 더 의지했다. 왜 그런 디지털 신호에 더 집착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원래 있었던 길의 절대적 존재보다 어디서든 변하는 기술의 상대적 유연성에 귀를 기울였던 건 사실이다.
기술이 좀 더 거짓에 가깝다는 것을 일견 깨달았지만, 결국 거부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기술의 상식'과 '과학적 증명'의 힘을 믿었던 셈이다. 워치를 끄고 달렸다면, 오로지 길만 보며 '나와의 싸움'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워치를 켰기에 기술에 전적으로 의지했고 기술의 허점이 드러낸 보이지 않는 공포와 싸워야 했다. 그 공포감에 남은 '하프의 하프' 마라톤은 졸전을 펼친 것이나 진배없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자 마자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언뜻 스쳐갔다. 1997년 작품 '이벤트 호라이즌'(사건의 지평선)이다. 영화는 실종된 '이벤트 호라이즌'호를 구하기 위해 파견된 '루이스 앤 클락'호 대원들이 실제 일어나지 않은 공포 대신 이상한 환영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는 과정을 보여준다.
눈앞에 보이는 공포는 없지만,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지옥의 시작점을 경험한다는 설정이 우주라는 막연한 세상의 배경과 맞물리며 그 강도를 최고조로 올린다. 미지의 세계가 늘 공포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공포는 우리의 의식에 달려있다. 지옥은 단순히 단어에 불과하며, 내면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내가 이 마라톤에서 얻은 교훈은 공포를 만들어내는 의식과 감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의지가 어떠했는가였다. 이를테면 어떤 증상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불치나 난치로 인식하며 댓글을 달면 이를 보는 다른 이들이 '선택 편견'(Selection Bias)에 빠지며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실제로는 질병으로 이어지지 않는 증상일 뿐이고, 어떤 경우는 완치에 이른 환자들도 많지만, 댓글이 주는 부정적 여론 때문에, 그리고 이 여론을 대하는 이의 태도와 의지에 따라 공포감은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술을 의심했지만, 길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내 의지와 태도는 객관적 방향을 잃고 금세 꺾였다. 그렇게 공포를 받아들였고 완주할 때까지 그 공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완주 후 옆에 쉬고 있던 나와 비슷한 워치를 차고 있던 대만 러너에게 물었다. 그도 "28km로 찍혔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기술 대신 길을 믿었다고 했다.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허들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술은 그럴 때마다 '신의 선물'처럼 다가온다. 정확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쉽게 해결한다. '증명된 지식'의 그럴싸한 구원이다. 하지만 내 마음과 정신의 온전한 평화를 위한 '경험의 지혜'로 존재할 수 있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아니, 아직 역부족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내온 우리의 길과 경험에 의지해 지혜를 키우고 서로를 다독였다. 지식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힘에 의해 웃고 우는 그 '지혜의 영역'을 결코 침범할 수 없다. 마라톤의 길 위에서 오늘도 인간의 지혜 한 페이지를 다시 제대로 훑었다.
------- ④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괌=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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