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10대 시절 기억’이 지금의 내게 묻는다, “너 괜찮지?” [.txt]
수능·논술 대비 주류 기획들과 차별
금기, 동성애 등 십대 정직한 현실 비춰

한국 단행본 시장에서 ‘청소년 에세이’를 표방한 주류 출판물들은 교과서와 수험서의 하위 분야처럼 보이기도 한다. 논술을 대비해 지식과 교양을 딱딱하지 않게 풀어주거나, ‘입시 능력자들’의 공부 태도와 철학을 전수하거나, 공부에 지친 심신의 힐링법을 알려 준다. ‘다른 에세이’를 읽을 틈을 한국 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주지 않는다. 좋은 에세이는 작가가 통과해 온 울퉁불퉁하고 주름졌지만 내장까지 비치는 삶과 만나게 한다. 그 에세이 안에서 작가는 숨을 공간 없이 말갛게 노출되고, 그 에세이에서 자신을 본 독자들은 숨을 곳을 얻는다. 그러므로 현재의 즐거움도, 고민도, 우울도, ‘미래를 위해’ 유예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세상과 자신을 직시하게 하는 에세이는 어쩌면 ‘위험한 장르’인지 모른다.
미래에 베팅하는 ‘안전한 기획’ 대신 눈앞의 현재를 비추는 ‘용감한’ 청소년 에세이 시리즈가 나왔다. 시리즈가 붙든 기둥은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 각각을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장치이자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출판사 낮은산은 설명한다. “기억이 입고되고 저장되고 재생되는” 뇌 속 장소인 ‘해마’를 시리즈 제목으로 붙였다. 서로 다른 결의 청소년 시기를 거쳐온 작가들이 ‘나를 만든 기억’을 들려주며 지금 청소년인 독자들을 ‘내가 되는 시간’으로 안내한다. 첫 출간에 맞춰 4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책마다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로 차례를 뽑았다.
홍승은이 쓴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의 차례는 ‘거짓말’로 꿰어져 있다. ‘그 일이 내 잘못이라는 거짓말’ ‘애들은 모른다는 거짓말’ ‘사춘기 방황이라는 거짓말’…. 첫 장 ‘생애주기라는 거짓말’에서부터 그는 “지금 실패하면 모든 게 어그러진다는 말, 성적이 떨어지면 나중에 선택지가 없어진다는 말, 부모님 세대와 다르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너희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냐는 말”에서 이탈해 온 시간을 이야기한다. 사회가 짜준 그래프를 내 것으로 알고 살아왔던 그는 부모의 이혼과 학교에서의 괴롭힘, 느닷없이 떠맡은 가장의 역할, 17살에 고등학교 자퇴란 ‘갑자기’ 맞닥뜨린 세계에서 “약속된 길만이 행복을 안겨 줄 거”라던 “협박”과 맹렬하게 대치한다. “내가 직선에서 벗어나 백지에 툭 떨어지게 된 건 실패가 아니었다”고 쓸 수 있게 된 지금 그는 “내가 선택한 적 없는 기대를 기꺼이 배반하자”며 사회와 부모가 ‘나중에 알아도 늦지 않다’고 뒤로 물릴 비밀들을 하나씩 말해준다.
“세계가 입 다물면 우리가 입을 열면 된다. (…) 떠들어야 열리는 문이 있다. 비밀일 필요 없고, 비밀이어서는 안 되는 비밀들.”
김현(‘우리 반에도 있다’)의 차례는 ‘사람’으로 설계돼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우리 반에는 없죠?”란 질문과 동시에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리는 사람. 남중·남고를 다닌 6년은 “미스 김”이라 불리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속이 시원한 상처”를 감내해야 했던 시기였다. “수면제를 모았고 목을 매어 보기도 했”으며 “그 모든 일이 미수에 그치는 동안 내 곁엔 아무도 없”던 그때 그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당신들이 아무 일도 없다고 믿는 지금에도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려주고 싶”어 일기를 썼다. 이제 시인이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성소수자”로 살아남은 그는 투명 인간 취급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그런 사람이 ‘청소년 당신’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을 다듬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알아채고 물어보고 이어지길 바란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곁에 두었는지 모르는 당신이라면, 알아채고 물어보고 이어지길 바란다.”
국어·문학 교사인 서현숙(‘난처한 마음’)은 ‘~하다면’을 고리로 이야기한다. 18살의 그는 전교생 조회 때 줄 맞춰 서 있기 싫어 친구와 학교 뒷산으로 도망갔던, 심화반 운영에 항의하며 출석부를 쓰레기통에 처넣던, 책상·의자를 화장실로 뺀 뒤 “야자를 째”고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읽던, 한편으론 ‘반항적 학생’이었지만 한편에선 “후회가 종교였다면 착실한 신도가 되었을” 소심한 청소년이었다. ‘혼자라고 생각된다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살아갈 힘이 약해져 있다면’,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그 ‘난처한 마음들’이 적절한 제목을 찾길 바라며 그는 등을 두드린다.
“살아 있다는 건 숨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들숨과 날숨으로 세상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거지. (…)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구는 자기 삶에 힘껏 애를 쓰고 있는 생명체들로 꽉 차 있는 게 아닐까. 이 힘으로 지구는 숨을 쉬고 있는 게 아닐까.”
김중미(‘친구를 기억하는 방식’)는 ‘나의 오늘’이 돼준 친구들의 이름을 한명씩 부른다. 구정물 뿜는 대걸레를 빨간 맨손으로 빨던 중 집에서도 밥과 빨래를 도맡아 해야 했던 “엄청난 비밀”을 들려준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아이, 친구들처럼 세계 아동문학전집을 갖고 싶었던 작가가 장미 가시로 스스로를 찌른 ‘모종의 작전’에 입 다물어준 연숙이, 인천 만석동에 처음 아가방을 만든 1987년 “동생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고 막내와 셋째를 아가방에 맡긴 뒤 1학년인 둘째와 함께 학교에 갔”던 “고작 열살짜리 아이”이자 현재 공부방 이모로 평생의 동지가 된 재양이. 그리고 작가가 “초등학교 4·5학년 때 오줌을 쌀까 봐 잠을 못 자던 밤마다 불러내” 대화를 나누던, 현실의 그 대신 학교를 빼먹고 오토바이를 몰아 서울에 가고 탄광이 있는 태백에도 간, 아니 그가 ‘보낸’ 가상의 친구이자 그의 다른 자아 정아까지. 그 이름들을 통해 “관계가 사람을 어떻게 구하는지” 들려준다.
“지금의 ‘나’는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났을 때의 순전한 내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다듬어지고, 바로잡아지고, 깊어지고, 풍성해진 ‘나’이다. 내 안에는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의 여러 모습이 스며 있다.”
그 시절, 누군가는 너무 흐릿해서, 누군가는 도저히 흐릿할 수 없어서, 이래서, 저래서, 그래서 모두 문제였던 사람들이 이렇든, 저렇든, 그것이 무엇이든 ‘문제가 아니라 자기다움’이길 바라며 쓴 글들이 독특한 표지 그림들과 함께 청소년들의 마음 앞에 바짝 붙어 앉아 문을 두드린다.
시리즈엔 차례 외에 통일된 형식이 하나 더 있다. 맺음말 성격의 글들이 모두 편지의 틀을 빌렸다. 홍승은은 “너 왜 이렇게 됐어?”란 질문으로 그를 무너지게 했던 명주에게, 김현은 막 12살이 됐을 조카 수아에게, 서현숙은 자신의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에게 썼다. 김중미는 거꾸로 편지를 받는다. 정아가 더는 자신을 찾지 않는 ‘중미’에게 편지로 묻는다.
“괜찮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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