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한테서 부여받는 특권이 더 명예롭고 안정적이다” [.txt]

조일준 기자 2025. 4. 2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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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민주정 옹호한 변론가·정치인 데모스테네스
최자영 교수, 변론문 전집 7권 국내 첫 번역본 출간
“잘못된 결정 바로잡는 게 풀뿌리 민주주의의 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래쪽 광장(아고라)은 민회와 재판이 열리고 사교가 이뤄진 그리스 민주정의 경연장이었다. 독일 화가 레오 본 클렌체의 1846년 작. 위키미디어 코먼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오늘날 아테네) 출신의 변론가이자 정치인이다. 번성했던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 패배한 뒤 몰락해 가는 과도기를 살았다. 부친은 부유한 자산가였는데 데모스테네스가 7살 때 타계하며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후견인들의 부실한 관리 탓에, 그가 성인이 되어 물려받은 유산은 그 10분의 1에 불과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부친의 재산을 되찾겠다고 결심하고, 유산 상속 변론가 이사이오스를 가정교사로 들여 법률과 변론술을 배웠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다른 학당에서 학문을 닦는 소피스트가 아닌 변론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스무살이 되던 해에 제1 후견인을 고소해 6년 만에 승소했다. 그는 단시간에 명성을 얻고 경제적 풍요까지 누리게 됐다.

데모스테네스는 개인 재산권 회복을 위해 변론을 배웠지만, 점차 도시(폴리스)와 헬라스(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도시국가 세계를 부른 명칭)의 자유와 민주적 가치 수호를 위한 공익 변론에도 적극 참여했다. 나이 서른에 정치에 투신하면서는 사적 소송 변론을 그만두었는데, 이해충돌을 피하려는 도덕적 판단에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모스테네스는 생전에 수십편의 변론문과 서신을 남겼다. 그의 변론은 그 자체로도 뛰어난 훌륭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발상지 그리스의 격변기 정치사와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고전적 사료로 가치가 크다.

데모스테네스(전 7권), 데모스테네스 지음, 최자영 옮김, 나남, 각 권 2만~3만원

그의 변론과 저술을 집대성한 ‘데모스테네스(전 7권)’가 최자영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의 6년여에 걸친 노고를 거쳐 첫 우리말 번역본으로 나왔다. 최 교수는 그리스 국가장학생(1987~1991)으로 유학해 역사고고학 박사 학위(1991)를 받은 고대 그리스 정치와 법제 전문가다.

이번 책에는 데모스테네스의 변론 59편과 변론 서설, 장례 추도사, 서신 등을 실었다. 데모스테네스의 생애와 당대 헬라스와 국제정치 상황 등 큰 틀의 배경지식을 설명한 해제(제1권 수록)는 책 전체의 맥락적 이해를 돕는다. 각 변론은 도입부마다 그 내용과 배경을 요약한 해설을 붙였다. 그리스 법과 정치제도를 개괄하는 부록과 용어 해설(제7권 수록)도 깊이 있는 이해의 길라잡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인이자 철학자이며 웅변가인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를 “고대 최고의 연설가”라고 극찬했다. 뒷날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원제의 정확한 번역은 ‘인물 대조 열전’이라야 맞다)에서 키케로와 데모스테네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데모스테네스의 웅변은 간단명료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문체는 어느 문인보다 아름답고 찬란했으며, 논리의 정확함과 치밀성은 어느 논리학자나 수사학자들보다도 뛰어났다. 반면, 키케로는 대학자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인이었다.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에는 주제에 대해서만 집중된 무서울 정도의 진지함이 살아 있다. 반면에 키케로의 연설은 농담이 너무 심해서 자신의 품위마저 깎아내리는 일도 있었다.(…) 데모스테네스가 훨씬 더 위대하고 신중한 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2, 이성규 옮김, 현대지성)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의 대리석 흉상. 작가 미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데모스테네스가 민회와 법정에서 발표했던 변론문들은 이해당사자 간의 논쟁뿐 아니라 당시 그리스 폴리스들의 모습을 생중계처럼 보여주는 ‘아고라(광장)의 언어’이다. 예컨대, 페르시아의 무력 강화에 대비해 납세분담조합(부유한 시민이 전쟁비용을 분담하는 조합)의 개선을 요구한 ‘납세분담조합에 대하여’는 당시 아테나이 부유층이 정치적 특권보다는 사회적 의무를 짊어져야 했던 계층임을 보여준다.

도시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면세특권의 폐지에 반대한 변론은 아테네 시민의 특권이 신분이나 부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기여의 보상이었음을 알려준다. “특권을 받는 자가 누리는 물질적 혜택과 관련해, 참주들이나 과두정치 체제를 가진 자들은 선택된 이를 당장에 부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으로부터 부여되는 특권이 그 명예와 안정성에서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면세특권 관련하여 렙티네스에 반대하여’ 중에서)

외세 침략과 내부 분열로 아테나이 민주정 체제가 흔들리던 상황에서,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이 마케도니아에 맞서 아테나이의 패권을 지키고 주변 도시국가들을 포용하며 자유와 민주의 수호자 구실을 해줄 것을 호소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참주정이나 과두정이 아닌 민주정체 사이에서만 굳건한 우정과 동맹이 가능하다고 봤다. 그런 믿음을 보여주는 변론이 로도스 민중의 체제 전복 혁명을 원조하자고 역설한 ‘로도스인의 자유를 위하여’다.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전투함 삼단노선을 그리스 해군이 복원한 모습. 삼단노선은 건조와 운용에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부유한 시민들이 납세분담조합을 만들어 비용을 공동 부담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로도스는 기원전 800년 이후 상업과 해운으로 번성했던 섬이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479) 이후 아테나이를 주축으로 한 델로스 해상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에서 아테나이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주도한 스파르타에 패배하자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해 스파르타와 공조했다. 이때 스파르타의 사주로 민주정체에서 귀족정체로 돌아섰다. 기원전 355년에는 페르시아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면서 소수 권력자가 사익을 추구하는 과두정 양상마저 띠었다.

로도스의 민주파는 과두정체를 전복하고 민주정체를 세우려는 체제 전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민주파 망명객들이 아테나이에 원조를 요청했다. 아테나이의 여론은 양분됐다. 데모스테네스는 적극적 개입을 주장했다. 모든 헬라스인이 민주정체를 갖는 게 아테나이에도 이득이라는 논리를 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행위를 한 이는 피해자들만의 적이 되지만, 자유의 정치체제를 전복하여 과두정체로 바꾸는 이는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이가 공동의 적으로 여기도록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이 그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이가 가져 주기를 바라는 그 같은 연민을 질곡에 처한 다른 민주정체에 대해 갖는 것이 도리입니다.”

최자영 교수는 “기득권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국민의 정치적 발언권이다. 데모스테네스 변론은 당시 그리스의 최고 의결기구이던 민회와 민중의 발언권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더욱 정치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우리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처럼, 민회가 잘못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는 바로 정치가를 탄핵하고 (잘못을) 바로잡는다.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덕분이었다”라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 비춰보면,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강화가 민주정치의 근본적 힘이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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