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 인터뷰] "한국 아낀 프란치스코 교황, `한반도 평화의 꿈` 잃지 않았다"

박영서 2025. 4. 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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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보이고 식사한 이유는… 삶도 죽음도 청빈하게
악수 대신 큰절 올립니다, 웃으며 받아준 이임 인사
소노 디스포니빌레… 평화의 다리를 놓겠다는 약속
'광이불요'의 삶, 우리 시대 지도층에게 던지는 질문
이백만 전 주교황청 대사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회고하고 있다. 박동욱기자 fufus@
2020년 10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임하는 이백만 전 주교황청 대사의 큰절 인사를 기쁘게 받아주고 있다. 이백만 전 주교황청 대사 제공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장례식은 오는 26일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5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거행된다. 전 세계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 슬픔 속에서 교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사람의 기억이 주목받고 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주교황청 한국대사로 재임했던 이백만 전 대사.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을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도 가슴 벅찬 시간'으로 회상한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면서 교황직을 수행했고, 단 100달러라는 소박한 유산만을 남긴 삶이었다. 그런 교황이 한국과 한반도에 품었던 사랑과 관심은 결코 작지 않았다. 교황은 즉위 후 첫 아시아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고, 한반도 평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북한 방문까지 진지하게 추진했었다. 이 전 대사는 교황의 인간적인 모습부터 방북 추진 이야기까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순간들을 풀어놓았다.

대담 = 박영서 논설위원

-교황 선종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정말 애통했다.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교황님은 종교 지도자이기 이전에 평화의 사도였고 한반도의 벗이셨기 때문이었다. 교황님은 누구보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아직 하실 일이 많으신 분이었고, 그토록 굳건한 사명을 갖고 계셨는데 이토록 서둘러 가셔야만 했는지 마음이 미어진다."

-교황은 어떤 분이셨나.

"한마디로 규정하긴 어렵지만, 처음 뵙을 때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악수를 하는데, 손이 아기 손처럼 보드랍고 따뜻했었다. 꼭 껴안아주는 포용력을 감지했었다. 그런 따뜻함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이 가진 신비함은 더 깊이 느껴졌다. 그건 나만의 느낌만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교황님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이유일 것이다."

-곁에서 지켜본 교황의 삶은 실제로 어떠했나.

"나는 3년간 교황청 대사로 있으면서 교황님을 자주 뵙고 가까이에서 그분의 삶을 지켜봤다. 삶 전체가 청빈의 여정이었다. 바티칸 사제들의 공동 숙소인 산타 마르타 하우스에 거처하셨고, 그 중에서도 2층 201호, 약 15평 남짓한 손님용 방에서 지내셨다. 식사도 별도 공간이 아닌, 사제들과 함께 공동 식당에서 하셨다. 함께 식사하는 이들이 불편해할까봐, 늘 등을 보인 채 밥을 드셨다. 교황직을 무보수로 수행하며 재산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런 철학의 연장선이다. 선종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삼중관 대신 한 겹짜리 목관을 선택하셨다. 마지막 안식처도 화려한 성베드로 성당이 아니라, 생전 애정이 깊었던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었다. 100여 년 만에 바티칸 외부에 안장되는 사례다. 이 대성전은 한국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의미가 큰 곳이기도 하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 교구가 북경 교구에서 독립한다고 선포한 장소다."

-이임 인사로 교황께 '우리식 큰 절'을 올렸다고 하는데,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

"2020년 10월, 이임 인사차 교황을 알현했을 당시 코로나19가 한창이었다. 교황 비서실장이 악수를 해도 된다고 했지만, 교황님께서 폐 수술 이력이 있어 혹시나 모를 감염 우려에 악수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대신 한국식 큰절로 인사드리겠다고 하니 당황하셨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어르신이나 존경하는 분 곁을 떠날 때 큰절을 드리는 전통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교황님은 흐뭇하게 웃으시며 의자를 당겨 앉으시고 절을 받아주셨다. 외교적 형식보다 마음을 더 중요하시는 분이었기에 가능했던 장면이었다."

-교황은 한국을 각별히 여겼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개인적인 인연이다. 아르헨티나 주교 시절, 교구에 병원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환자들을 간호해 주셨던 수녀님들이 철수하게 됐다. 한국에 요청했더니 성가소비녀회 소속 수녀님 세 분이 오셨다.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봤고, 교황님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은혜를 지금까지도 기억한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이다. 한국이 냉전의 마지막 잔재이며,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하셨다.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항상 강조하셨다. 선교사를 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였다는 역사도 높이 평가하셨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교황의 관심은 어느 정도였나.

"교황의 라틴어 명칭 중에 '폰티펙스'(Pontifex)라는게 있다.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황님은 '평화의 다리'를 놓는 분이셨다. 전 세계에 크고 작은 분쟁이 잦아들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와 화합의 씨앗을 뿌리는데 전력을 기울이셨다. 그분의 가장 간절한 꿈 중 하나는 남북한 지도자들과 손을 맞잡고 판문점을 함께 걷는 것이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의 다리를 놓고자 하는 바람이 그만큼 깊고도 절실했던 것이다. 지금 그 뜻을 우리가 어떻게 이어갈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모두가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한반도 정세에 각별한 시선을 두셨던 것 같은데, 교황의 방북 프로젝트는 어떻게 추진됐나.

"2018년 1월 교황청 주재 한국 대사로 부임하면서 나는 '교황 방북'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었지만 미국과 북한은 '핵 단추' 설전을 벌였고, 남북 관계도 경색돼 있었다. 나는 교황님께 '한반도에 희망의 메시지를 직접 전해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황님은 과거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를 중재한 경험을 언급하며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셨다. 그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교황님을 알현하며 방북을 요청했다. 교황님은 '소노 디스포니빌레(Sono disponibile·나는 간다)'라고 답했다. 의전도, 전례도, 모든 형식을 초월한 그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교황청 내부의 반대는 없었나.

"물론 반대 의견이 있었다. 사제가 한 명도 없는 북한을 교황님이 방문하는 것은 전례에 맞지 않는다는 기류가 만만치 않았다.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교황님의 방문이 김정은 정권의 선전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럼에도 교황님은 정면으로 돌파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교황이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선교사다', '사제가 없기 때문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사제가 없기 때문에 가야 하는 것이다.' 복음 전파의 본질을 중시한 교황님의 결단은 교황청 안팎에 큰 울림을 줬다."

-당시 교황청이 북한 측에 제시한 조건이 있었다 하던데.

"다섯 가지였다. 첫째, 가톨릭 공동체를 법적으로 인정할 것. 둘째, 교황청이 승인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도록 허용할 것. 셋째, 신자들이 자유롭게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넷째, 종교 탄압으로 수감된 이들을 석방할 것. 다섯째, 종교기관의 인도적 지원을 허용할 것. 교황청은 이 조건들이 수용된다면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의 종교 개방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는 진심이었다고 보나.

"상당히 있었다고 본다. 김 위원장은 스위스 유학 경험이 있어 서구 문화와 카톨릭을 이해했다. 이탈리아도 여행했었다. 중국과 베트남이 공산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제한적으로 종교를 개방해 정상국가가 된 전례가 있었기에 김 위원장이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

-방북이 무산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게 결정적이었다. 회담이 성공할 것으로 기대됐었으나 존 볼턴 국가보좌관이 개입하면서 회담이 결렬됐다. 그 충격이 컸던지 김 위원장은 모든 대외관계를 끊어버렸다. 교황님의 방북 프로젝트도 끝났다. 그 회담에서 진전이 있었더라면 교황님은 분명히 방북하셨을 것이다."

-차기 교황의 방북 가능성은 없는가 .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미북 관계 개선이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김 위원장한테 좋은 신호를 보내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차기 교황의 방북 추진이 재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고려해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프로젝트 내용과 과정, 무산된 아쉬움, 그 뒤에 숨은 의지까지 기록·정리한 '나는 갈 것이다, 소노 디스포니빌레'라는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을 교황님께 직접 헌정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분께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교황님의 뜻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교황의 태도에서 한국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교황님은 '광이불요'(光而不耀)였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이 경구는 '밝게 빛나되, 그 빛으로 남의 눈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뜻이다. 교황님의 삶이 딱 그것이었다.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 빛났고, 그 빛은 결코 다른 이의 눈을 부시게 하지 않았다. 우월함이나 업적을 내세우는 법 없이 목표를 향해 조용히 전진하셨다. 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리에 두며 진실로 세상을 품었다. 우리 사회 지도층이 반드시 본받아야할 덕목이다. 특히 종교계 인사들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이백만 전 대사의 목소리엔 아쉬움과 믿음이 동시에 묻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떠났지만, 그가 꿈꾸던 '평화의 다리'는 아직 우리에게 닿아 있다. 이제 그 다리 위를 누가 먼저 걸어 나설 것인가, 그 대답은 우리 모두에 남겨져 있다.박영서 논설위원

py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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