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아내에 대하여

2025. 4. 2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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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나보다 아홉 살이 더 많다. 서른한 살에 아내를 만났으니 우리가 같은 나이대로 불린 것은 내가 마흔, 아내가 마흔아홉이 되던 해 그때뿐이었다. 우리는 딱 1년을 같은 사십대로 불리다가 다시 멀어진 셈이다. 지금 아내는 오십대, 나는 아내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사십대의 끝을 달리고 있다.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가전제품 설치기사님이 느닷없이 착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도 잘 도와주고 착하다고. 아내는 뭐라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짧은 머리에 러닝셔츠를 입고 있던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그 일이 잊힐 때쯤, 대학 시절 다니던 가게의 사장님이 아내를 향해 엄마냐고 물었다. 그 두 번의 일이 아내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내는 옷을 좋아하고 꾸미는 것도 즐겼다. 함께 카페를 하며 아무래도 나이 차를 신경 쓰는 눈치였다. 어떤 날은 볼에 빨간 화장이 짙어 놀린 적이 있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많이 발린 줄도 모르고, 청국장 집 방바닥에 앉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웃겨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아내는 나름 유쾌한 사람이지만, 자꾸 엄마라고 불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적당히 흰머리가 내려앉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학생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다니던 시절은 지나갔다. 아내를 위해서라도 더 중후하게, 내려앉은 흰머리는 염색할 생각 말고 잘 정돈해서 다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우리는 외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더 가까워졌다.

가끔 아내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장모님을 돌보고 나를 뒷받침하는 게 자신의 기쁨이라고. 그런 아내가 장모님을 돌본 지도 12년이 되었다. 아내는 화장실에 다녀왔느냐고 물으며 장모님의 방문을 열고, 화장실을 다녀오게 한 뒤 잠자리를 봐주고 방문을 닫는다. 아흔이 넘은 노모를 돌보고 아직 쉰이 되지 않은 남편을 뒷받침하며 온전히 하루를 보낸다. 가끔 깐죽거리는 어린 남편에게 사자후를 내뱉는 것으로 반복되는 하루를 참는다.

뒤늦게라도 결혼을 하게 된 것은 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와 함께 살면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답이 나왔다. 공무원 시험에 실패하고, 간신히 아카데미에서 커피를 배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내게 결혼 전 아내는 같이 카페를 해보자고 제안했었다.

글을 쓰기까지, 아내의 도움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스갯소리로 이번 생은 당신에게 신세 좀 지겠다고 말한 적이 많았다.

아내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사랑해'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 나는 조금 간지러웠다. 의무적으로 하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고 대들기도 했다.

그러다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어쩌면 그런 말들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잠들 때면 걱정이 많은 아내에게 "내가 잘 지켜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말한다. 여전히 "사랑해"라고는 얼버무리듯이 말하지만. 이제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아내라고 먼저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윤재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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