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시대 - 행복으로 가는 길

초록이 환한 사월이다. 어린이집 가는 길도 예식장 가는 길도 장례식장 가는 길도 환하다. 가을이면 낙엽이 될 초록을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산다. 경이로운 자연을 통해 삶의 순리를 배운다. 고령화 사회가 도래한 만큼 요즘은 죽음과 맞닥뜨리는 일이 잦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부모님을 여읜 친구들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나 또한 늙음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늙음과 죽음은 인간이 직면하는 실존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는다는 자명함을 알면서도 직면하면 두렵다. 병원을 드나들며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환자들을 보면 괜스레 우울해진다. 한때 노년 문학을 연구한답시고 노년에 쓴 작품을 연구하다가 전이되어 우울과 고독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다. 3년을 힘들게 살았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희망의 시인 이육사를 연구였다. 논문은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이육사의 작품을 통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령화 사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늙음과 죽음을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늙음과 죽음은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정신적·육체적 편리성을 가져다줬지만, 정신적인 빈곤을 낳고 있다. 근대화로 핵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노인이 가족에서 분리되었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으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사회문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출산으로 "노인 공화국"시대가 도래한 현실 앞에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은 없을까? 저출산과 고령화가 맞물린 사회현실이지만 연로한 부모님이 계시니 노인 문제가 더 크게 자리한다.
늙고 죽는 것에 대해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인간이 실제로 죽는다는 사실보다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여기에서 지식이란 사회에서 분리되는 고독과 두려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목숨만 연명하는 100세 시대가 일부 노인들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고령화 사회를 일각에서는 '노인 공화국' 시대로 '회색 쇼크(Shock of Gray)'가 도래되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렇다고 노년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노인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인간의 지복(至福)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 몽테뉴 말처럼 이제는 '살기 to live', '잘 살기 to live well', '더 잘 살기 to live better'에서 '잘 죽기 well die' 시대로 가야 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고귀한 감성은 대신할 수 없다.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죽음이란 뭘까? 잠시 고통이 사라지면 이 좋은 세상 자식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더 살고 싶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길을 오가는 고통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풋풋한 사월처럼 누구나 기운찬 시절이 있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눈앞에 성큼 다가서는 노년의 삶, 나도 머잖아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생리적, 심리적, 신체적, 환경적으로 나타나는 노화 현상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병원에 누워있으나 산에 누워있으나 다를 바가 없다는 어느 노인의 말처럼 인명은 재천인 것을 하늘의 뜻을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되는 것이라 했지만, 육체가 떠나면 영혼의 잔영도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인간은 감각, 쾌락, 감정의 동물이므로 진리(지혜, 현실, 실상)에 이르려면 죽어야 도달한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항상 더 낫고 더 크고 더 맛있는 것, 불멸까지 갈망한다. 우리는 욕망뿐만 아니라 노화와 죽음,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처럼 죽음도 두려워도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세상 잘 살아온 것처럼 죽음도 축복의 길이라는 것을….
Copyright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