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남았는데… 오늘은 다시 살아가는 날”

유상현기자 2025. 4. 2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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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화마'가 삼킨 안동 일직면 명진리 82-1번지''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 잃은
주민 26명 선진이동주택 둥지
주방·옷장·난방시설도 갖춰
안동시, 전체 956세대 공급
이달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
안동시 일직면 명진리 선진이동주택 입주 현장.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이 가족과 함께 임시주택에 들어서기 전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유상현 기자 제공
23일 이호운(64) 명진리 마을 이장이 선진이동주택에 입주하고 주변을 둘러 보고 지난 산불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유상현 기자 제공

23일 오후 3시, 안동시 일직면 명진리 82-1번지.

여전히 그을음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마을 한복판에, 새 집들이 줄지어 섰다. '선진이동주택'. 이름처럼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집'이었다.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 26명이 오늘, 19채의 작은 집에 둥지를 틀었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습니다. 집은 다 탔지만, 오늘은 다시 사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몸만 남았는데, 이렇게 살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입을 열던 이호운(64) 명진리 마을 이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무너진 집 앞에서 차마 울 수 없었던 그는, 이제야 눈물을 허락받은 듯했다.

지난달 24일 오후 5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불길은 마을을 삼켰다.

이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주민 30여 명을 하나하나 대피시켰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등에 업은 채 가장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났다. 불이 등을 태울 듯 쫓아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먼저 피신시키는 게 이장인 제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이호운 이장은 '이장'이 아니었다.

그는 2주 동안 안동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지냈다. 남은 건 '몸 하나'. 집도, 예물도, 가족사진도 다 타버렸다.

"가족사진이 다 불탔어요. 우리 추억이 담긴 것들인데,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그는 말끝을 흐렸다.

마을회관으로 옮긴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매트를 펴고 바닥에 누우면, 천장은 너무 높고 마음은 너무 낮았다.

"살아 있다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였어요. 하루하루가… 그냥 버티는 거였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오늘, '집'이 생겼다.

주방과 옷장이 있고, 바닥난방에 에어컨까지 갖춰진 27㎡ 남짓한 공간.

언뜻 작아 보였지만, 그 안엔 '다시 살아갈 이유'가 꽉 들어차 있었다.

입주식이 끝난 뒤,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얀 벽, 새 가구, 정갈한 조리도구…"들고 나온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몸만 와도 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생필품 박스를 하나씩 꺼내 보며, 그는 마침내 눈물을 삼키지 못했다.

"안동시가 너무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못 잊습니다."

이번에 설치된 이동주택은 모두 37동. 안동시는 전체 956세대 공급을 이달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권기창 안동시장은 "재난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영구주택 마련까지 시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 약속했다.

이호운 이장은 이제 새 마당을 걷는다. 발밑엔 아직도 잿더미가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선 '다시'가 시작되고 있었다.

"불은 모든 걸 삼켰지만, 이 집 덕에 제 마음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집을 새로 짓는 그날까지… 시가 지금처럼 도와준다면, 저는 끝까지 이 마을을 지킬 힘이 생길 것 같아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순간,이호운 이장은 다시 명진리의 '이장'이었다.

불이 빼앗아간 자리에, 사람의 온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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