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남았는데… 오늘은 다시 살아가는 날”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 잃은
주민 26명 선진이동주택 둥지
주방·옷장·난방시설도 갖춰
안동시, 전체 956세대 공급
이달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


23일 오후 3시, 안동시 일직면 명진리 82-1번지.
여전히 그을음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마을 한복판에, 새 집들이 줄지어 섰다. '선진이동주택'. 이름처럼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집'이었다.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 26명이 오늘, 19채의 작은 집에 둥지를 틀었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습니다. 집은 다 탔지만, 오늘은 다시 사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몸만 남았는데, 이렇게 살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입을 열던 이호운(64) 명진리 마을 이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무너진 집 앞에서 차마 울 수 없었던 그는, 이제야 눈물을 허락받은 듯했다.
지난달 24일 오후 5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불길은 마을을 삼켰다.
이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주민 30여 명을 하나하나 대피시켰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등에 업은 채 가장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났다. 불이 등을 태울 듯 쫓아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먼저 피신시키는 게 이장인 제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이호운 이장은 '이장'이 아니었다.
그는 2주 동안 안동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지냈다. 남은 건 '몸 하나'. 집도, 예물도, 가족사진도 다 타버렸다.
"가족사진이 다 불탔어요. 우리 추억이 담긴 것들인데,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그는 말끝을 흐렸다.
마을회관으로 옮긴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매트를 펴고 바닥에 누우면, 천장은 너무 높고 마음은 너무 낮았다.
"살아 있다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였어요. 하루하루가… 그냥 버티는 거였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오늘, '집'이 생겼다.
주방과 옷장이 있고, 바닥난방에 에어컨까지 갖춰진 27㎡ 남짓한 공간.
언뜻 작아 보였지만, 그 안엔 '다시 살아갈 이유'가 꽉 들어차 있었다.
입주식이 끝난 뒤,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얀 벽, 새 가구, 정갈한 조리도구…"들고 나온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몸만 와도 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생필품 박스를 하나씩 꺼내 보며, 그는 마침내 눈물을 삼키지 못했다.
"안동시가 너무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못 잊습니다."
이번에 설치된 이동주택은 모두 37동. 안동시는 전체 956세대 공급을 이달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권기창 안동시장은 "재난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영구주택 마련까지 시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 약속했다.
이호운 이장은 이제 새 마당을 걷는다. 발밑엔 아직도 잿더미가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선 '다시'가 시작되고 있었다.
"불은 모든 걸 삼켰지만, 이 집 덕에 제 마음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집을 새로 짓는 그날까지… 시가 지금처럼 도와준다면, 저는 끝까지 이 마을을 지킬 힘이 생길 것 같아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순간,이호운 이장은 다시 명진리의 '이장'이었다.
불이 빼앗아간 자리에, 사람의 온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Copyright © 경북도민일보 | www.hidomin.com | 바른신문, 용기있는 지방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