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말로 시간을 빌려 쓰기 [달곰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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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러지 못하다가 그 공간을 벗어난 뒤 비로소 잊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일에서 시간과 공간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 없이는 공간을, 공간 없이도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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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흔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러지 못하다가 그 공간을 벗어난 뒤 비로소 잊게 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흔한 일이다. '트렁크'라는 드라마에는 유년 시절 어머니와 집에서 있었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남자와, 결혼식을 앞두고 예비신랑이 사라졌지만 파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비신랑 집을 떠나지 못하던 여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집’을 벗어남으로써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일에서 시간과 공간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 없이는 공간을, 공간 없이도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 언어에서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시간이 있다, 없다, 간다'는 말에서 '있다, 없다, 가다'는 공간과 관련된 말이다. 우리는 시간을 공간화해서 인식한다.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추상적 개념인 데 반해 공간은 눈에 보이고 비교적 구체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공간을 나타내는 말을 시간을 나타낼 때 빌려 쓰는 것이다.
'앞, 뒤'도 그런 말 중 하나이다. 공간에서 '앞'은 어떤 기준으로부터 향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 시간에서 '앞'은 장차 올 시간을 나타내기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너의 앞날을 축복한다'는 말에서 '앞날'은 미래를 나타내지만 '앞 세대'에서 '앞'은 미래 세대가 아닌 이미 지나온 세대를 말한다. 한편 '뒷일을 부탁해'에서 '뒷일'은 미래를 나타낸다.
이러한 혼란은 영상을 '앞으로 돌리다' '뒤로 돌리다'를 해석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영상을 '앞으로 돌린다'는 것은 지나간 쪽으로 돌리는 것일까, 나아가는 쪽으로 돌리는 것일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달랐다. 카세트테이프 녹음기에 있던 '되감기' '빨리 감기'라는 말 역시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앞으로 감기' '뒤로 감기'에 혼동이 있을 수 있어 쓴 말이었던 듯하다.
'앞, 뒤'를 '전(前), 후(後)'로 바꾸면 한 가지 뜻으로만 이해된다. 이 시간 '이전'은 과거, 이 시간 '이후'는 미래의 뜻으로만 해석된다. 이렇게만 보면 '앞'은 미래를 가리키는 일보다 과거를 가리키는 일이 더 흔한 것 같다.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서 보면 뒤는 이미 지나온 길인데, 앞은 볼 수 있지만 뒤는 보이지 않아 알 수 없기 때문일까.

이윤미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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