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 시대, 교황의 역할 [지평선]

이영창 2025. 4.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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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4월 1일 이탈리아 로마 제멜리 병원 앞에서 다섯 살 아이를 잃은 엄마를 포옹하며 위로하고 있다. 이날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관지염 때문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로마=로이터 연합뉴스

이탈리아에선 ‘뚱뚱한 교황 다음엔 마른 교황이 온다’는 말이 전해진다. 교황의 체중을 말하는 건 아니고, 교황 성향이 바뀜을 뜻하는 표현이다. 콘클라베에 임한 추기경들은 전임 교황에게 부족했던 장점을 가진 동료를 차기 교황으로 선출하려 한다. 교회가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중심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뚱뚱한 교황’ 이론은 러시아(소련 포함) 지도자 계보를 머리숱 풍성과 빈약의 교대 과정(레닌-스탈린-흐루쇼프 이후 푸틴-메드베데프-푸틴까지)으로 보는 가설보다는 좀 더 과학적이다.

□ 교회 개방성 관점으로 볼 때도 20세기 중반 이후 취임한 교황 성향은 대체로 개혁과 보수 사이를 오갔다. 권위적인 비오 12세 후임은 교회 개혁에 앞장선 요한 23세이고, 그다음 산아제한을 반대한 바오로 6세가 어부의 반지를 꼈다. 보수 신학자 베네딕토 16세 후임으로는, 가장 진보적 교황이라 평가받는 프란치스코가 콘클라베 선택을 받았다.

□ 보수적 전임자의 기저효과를 빼고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별했다. 모국에서 소외받은 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바티칸에서도 가자지구, 미얀마, 우크라이나 등 분쟁지역을 잊지 않았다. 이슬람국가(IS) 테러가 한창이던 이라크에서 시아파 지도자를 만나는 등 타 종교와 터놓고 교류했다. 한국에선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말을 남겼는데, 사제 본분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약자 편에 함께 서야 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줬다.

□ 힘으로 이웃을 때리는 스트롱맨, 돈돈 거리며 친구 뒤통수나 치는 장사치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카오스’에서, 유일하게 약자 배려와 평화의 가치를 말하던 지도자의 서거는 애석한 일이다. 힘과 돈의 논리가 판치는 때, 권력자에겐 따끔했고 아이와 소수자에겐 한없이 따스했던 ‘어른 프란치스코’의 부재는 더 아프다. ‘뚱뚱한 교황’ 이론에 따르면 교리와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적 교황이 등장할 차례다. 그러나 이번 한 번 정도는 법칙이 깨지는 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곧 콘클라베가 시작된다.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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