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보다 연대” 고 홍세화 선생의 ‘똘레랑스’를 질투하다

한겨레 2025. 4. 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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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20회
고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진보신당 대표 취임 직후인 2011년 12월 직전 직장이었던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앞에 섰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최근 우리 안의 작은 트럼프를 자주 마주친다. 난민과 이민자들, 장애인, 트랜스젠더, 빈민들에게 점점 더 편협해지는 태도와 더 싸늘해지는 냉대를 말이다. ‘남태령 대첩’에서 농민과 노동자와 학생, 여성과 성소수자가 한 데 모여 목소리를 낸 일에서 큰 희망과 기대를 품기도 했으나, 그 후 여성을 거기서 분리하려는, 소위 말해 ‘꿘’과 여성 의제 사이에 선을 그으려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이들의 입장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나아가 제노포빅적이고 우생학적인 관점으로 번지는 현상마저 목도하고서는 기대감이 다소 꺾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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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모든 배후에 있는 가상의 적으로 타국민을 지목하는 것. 다른 종교를 지닌 난민에 대한 공포를 퍼뜨리는 것.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삭제하는 것. 시험관 시술로 태어난 아기들을 ‘장애가 있는 정자’로 태어났다고 비하하는 것. 제노포비아와 우생학은 역사적으로 늘 극우와 파시즘의 무기였다는 것을 망각한 이들의 태도에 거의 절망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것이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비판해오던 ‘인셀’들과 무엇이 다른가?

인권 운동을 파이 싸움으로, 밥그릇 다툼으로 치환하는 운동들. 어떤 교차성도 제거한 채 자신이 가장 약자라고 우기는 것이 그저 이 싸움의 목적이 되어버린 듯한 이미 운동이 아닌 운동들. 소수자들이 연대하지 않고 서로의 조그마한 숟가락을 뺏고 경계를 가르며 땅 따먹기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누가 기뻐할 현상일까. ‘약자들이 좁은 경기장 안에 서로 스파링하는 꼴을 보며 이득을 볼 것은 결국 누구일까’라는 명백한 질문에 굳이 자답하진 않겠다.

“그렇다.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비관적인 생각에 잠길 때마다, 고 홍세화 선생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홍세화 은행장이 프랑스 망명 생활 20년 만이던 1999년 6월14일 고국 땅을 밟고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jani.co.kr

저서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고 홍세화 선생은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일원으로서 군사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졸업 후 입사한 회사의 파리 지사에 파견을 나갔다가 남민전 전원이 수배돼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망명자가 된 선생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택시 기사로 생업전선에 뛰어든다. 타국에서 이주노동자로서 20년을 보내고 가까스로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한겨레 신문’ 기획의원이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말과 활’ 발행인, 진보신당(노동당의 전신) 대표 등으로 활동하다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는 특정 민족이 아닌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이들로 구성된 속지주의 국가다. 특히 파리는 ‘에트랑제’라 불리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홍세화 선생이 이방인으로서 파리에서 느끼고 배운 것 중 가장 강조한 것은 ‘똘레랑스’의 정신이었다. 볼테르의 사상에서 출발한 이 정신은 개인의 이념과 신념 등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자는 데 뿌리를 둔다. 홍세화 선생은 똘레랑스를 흔히들 말하는 ‘관용’보다는 ‘용인’, ‘화이부동’ 즉 화평하면서도 획일화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고 강조해왔다. 존재의 ‘용인’은 누가 누구에게 받겠는가? 다수가 소수에게? 소수에 대한 다수의 탄압을 견제하는 똘레랑스 정신은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이를 단순히 싸우지 말자는 순진한 이야기로 오독해선 곤란하다. 홍세화 선생은 학생운동 시절부터 프랑스에 망명했던 이방인 시절, 조국에 돌아와 눈을 감기까지 한평생 싸워왔고 스스로를 ‘척탄병’이라 불렀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쓴 칼럼에서는 “국민의힘이 하면 안 될 행위를 주로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더불어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라며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세력에도 따가운 비판을 아까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레미제라블들과 코뮌들의 뜨거운 피 위에 세워진 도시, 파리에서 목격한 것은 지속 가능한 투쟁의 형태였으리라.

2011년 4월5일 홍세화 당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이 ‘청춘’을 주제로 열린 한겨레21 창간 17돌 기념 인터뷰 특강(서울시 마포구 서강대 곤자가컨벤션)에서 강의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미러링’이라는 전략은 어떤 득실을 남겼는지 곰곰이 되짚어 볼 때가 있다. 여성 역시 혐오적인 말을 발화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욕을 먹어보니 남성 역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 것은 분명 필요했던 일이었다. 다만, 수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이 전략이 유효한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꾸준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해준 결과, 남성들이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여 마침내 혐오와 차별을 멈추었나? 지금은 미러링이란 전략적 목표는 사라진 채 누가누가 더 혐오스럽게 욕을 하는지, 누구의 욕하는 목소리가 더 큰지, ‘똥’이라는 말을 제일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 마냥 ‘똥’을 던지며 대결하는 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심지어 그 ‘똥’은 다른 소수자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고작 몇 년 더 싸우고 말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투쟁은 모든 투쟁이 대체로 그러하듯 평생, 그리고 우리의 세대가 끝나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때까지 이어지리라. 다음 세대가 좀 더 나은 싸움을 할 수 있도록 유산을 남기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쉽게 지치지 않도록, 지속 가능한 투쟁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 안의 트럼프를 견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신체를 위험한 부작용에 노출시키는 시험관 시술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하고 재고를 제안할 수 있다. 거기서 새로운 논의를 이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시술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장애가 있는 정자’로 태어났다고 매도하는 일은 우생학을 신봉했던 히틀러 같은 생각인 것이다. 비만율이 높다고, 잘생겼거나 예쁘지 않다고, 신체 능력이 열등하다고, 지능이 낮다고, 그리하여 도태되어 마땅하다고 하는 모든 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부다. 우리, 같은 괴물이 되지는 말자.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내 안의 괴물을 다스리며, 견제하며, 때론 지기도 하며, 내가 이토록 그릇이 작은 인간이었나 좌절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건 “혐오보다는 분노, 분노보다는 연대”라는 홍세화 선생의 똘레랑스 정신이다.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파리의 한인사회에서도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그가 택시 하나로 이십 년 간 파리를 누비며 부딪히고 꺾였을, 때로는 비쥬와 포옹을 받기도 했을 그 세월과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에디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에디터가 <GQ>, <아레나>, <씨네21>, <코스모폴리탄>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격주 수요일 낮 12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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