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구례에서 보낸 한철

전남 구례에 가 열흘살이를 했다. 한달살이 앱으로 예약한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산골짜기의 초가지붕을 얹은 황톳집, '시고르자브종'(시골잡종) 2마리가 정답게 뛰어노는 마당과 뒤란에 벚꽃과 산수유, 철쭉과 매화가 아름다운 옛집이다.
평화롭고 게을리 부지런한 날들이었다. 아침 새소리에 깨 이불을 개고 집 주변을 산책했다. 가까운 사성암이나 조금 멀리 천은사, 화엄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물굽이가 아름다웠다. 경내의 해당화가 하도 환해 그 붉은빛에 뺨이 두근거렸다.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과 홍예교 수홍루를 지나 대숲을 흔드는 초록 바람소리, 물소리가 에워싼 경내에서 오색연등의 빛과 그림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점심이면 구례읍의 '북문토종흑돼지'나 '목화식당' '동아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옆 동네 곡성에 가 소머리국밥을 먹거나 참게메기탕을 먹기도 했다.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는 강물에 몸을 담근 채 쏘가리 루어낚시를 했다. 운수 좋은 날에는 하루 저녁에 예닐곱 마리씩 낚아 올렸다. 밤에는 황토방에 앉아 개다리소반에 두부구이를 올려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업무가 생겼는데 산골 초가집에서는 통신전파가 약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었다. 노트북을 챙겨 읍내 카페로 가 일했다. 방에 누워 유튜브 영상이라도 보려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데이터가 터지는 곳을 찾아야 했다. 한 닷새쯤 지나 미미하게나마 와이파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것도 이리저리 굴러야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덕분에 열흘 동안 '디지털 디톡스'를 제대로 했다. 도시에서는 밤에 좀처럼 잠을 못 자고 새벽 두세 시가 돼야 잠들었는데 시골에서는 머리만 대면 잤다.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숙면의 방법임을 깨달았다.
사고도 있었다. 곡성 도깨비마을 야외체험장에서 친구 아들과 놀아주면서 아동용 집라인 시범을 보여주다 오른손 검지와 약지가 골절됐다. 구례읍 병원에 갔는데 수술하지 않고 부목으로 고정만 했다. 다친 손가락이야 나을 테니 마음은 부러지지 말자고 했다. 옆구리에 섬진강이 있고 어깨 위에 지리산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바보 같은 부주의함에 화를 낼 법도 하고 당장 서울로 돌아가 큰 병원에 갈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산골살이 며칠 만에 느림과 불편함에 익숙해진 것이다. 어느새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법, 내게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주인어른께서 아궁이 불 때는 걸 깜박한 날엔 추운 대로, 너무 장작을 많이 넣은 날엔 뜨거운 대로 지냈다. 추우면 옷을 껴입고 더우면 깨벗었다. 티브이를 보려면 '장님과 앉은뱅이' 우화처럼 전원 담당 리모컨과 채널변경 담당 리모컨 2개를 써야 하는 황토방에서 티브이는 놔둔 채 책을 읽었다. 어느 저녁엔 주인어른의 이웃들이 돼지고기와 병어회와 간재미를 싸들고 오셔서는 방안에 누워 빈둥대는 나를 마당으로 불러내 막걸리를 사발 가득 채워주기도 했다. 구례 장날에 장진희 시인이 깔아놓은 미역 좌판에 가 말린 미역귀와 함께 시집 '섬진강 시인들'을 사온 일도 있다. 1만2000원 하는 시집을 사면 미역귀 5000원어치를 1만원어치로 무상 업그레이드해준다. 2만원을 드리고 거스름돈은 주지 말랬더니 펄쩍 뛰셔서 나도 펄쩍 뛰었다. 서로 더 주겠다는 장사와 손님이 우습다.
조르조 아감벤은 "영리함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고 했는데 도시적 욕망이 임계점을 넘어선 시대에 우리는 어리석게 보일 만큼 단조로운 삶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 처음 초가집에 갔을 때 분분하던 벚꽃은 떠날 때쯤 되니 완전히 지고 철쭉이 막 피고 있었다. 강아지들의 크고 맑은 눈망울에 철쭉이 어리비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열흘 만에 집에 오니 테라스에 심은 수국 묘목에 초록잎이 돋아나 있다. 너무 고요해 죽은 나무 아닌가 했는데 아름다움은 느리지만 분명하게 오는 것이다. 괜히 뭉클해 테라스에 한참 서 있었다. 삶은 또 분주하고 소란스럽겠지만 그 사이 수국은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꽃을 피워낼 테다. 다음 계절에 대해선 나 대신 꽃이 말하리. 그러니 어리석게 살아야겠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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