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세상을 흔든 유인물…무림 사건 진실규명
“팔레비(옛 이란 국왕)와 소모사(옛 니카라과 독재자)를 능가하는 악랄한 살인마 전두환에 맞서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몸 바친 2천여 광주의 넋 앞에 이 글을 바친다.
‘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
이 땅의 민주주의는 과연 죽었는가? 한 줌도 채 안 되는 반민족 파쇼지배집단의 물리적 탄압에 파시스트 언론의 조직적인 선전 음모에 의해 그 정신을 압살당하고 있는가? 일껏 축적된 투쟁 역량은 이대로 와해되고 말 것인가? 혁명적 열기와 반동적 폭압의 크나큰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도 의연히 자리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가?”
이렇게 시작하는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문’은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김명인이 쓰고, 김회경 등이 뿌렸다. 1980년 12월11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도서관 앞이었다. 이 선언은 5·18 민주화운동 이후 숨죽였던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에 도전장을 내는 신호탄이었다. 후과는 컸다. 서울대 학생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경찰과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현 국군방첩사령부)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고 70여명이 검거됐다. 이들은 에이(A), 비(B), 시(C)급으로 분류되어, 에이급 11명은 구속되고 비·시급은 군 입대, 군 복무자 원대 복귀, 훈방 등의 조치를 받았다.
진실화해위는 22일 오후 열린 제106차 전체위원회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조직사건으로 꼽히는 ‘무림 사건 관련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로 진실규명(피해 확인) 결정을 내렸다. 신청인은 김명인(67) 인하대 명예교수와 현무환·최영선·허헌중·김회경·김창호·유정희(이원주의 배우자)씨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함께 피해 및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등을 권고했다.
당시 이 사건 수사과정을 통해 서울대 비공개 학생운동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수사기관은 이를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무림(霧林)’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정화 내무부장관은 대통령 전두환에게 이 사건 수사 상황을 보고하면서 “서울대 핵심 조직원 80명을 모두 검거하여 처단하는 것이 향후 학원 내의 소요 사태를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건의했다.
1999년 서울남부지원은 김명인·김회경 등이 청구한 무림 사건 관련 재심에 대해 계엄법 위반 부분에 한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김명인의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의 형을 선고했다. 반공법 위반은 고등법원에서는 선고유예 판결로 바뀌어 확정되었다. 2018년 김명인은 또 한 번의 재심을 청구해 2020년 반공법 위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진실화해위는 자료 및 진술조사 결과 “신청인들이 연행된 이후 상당한 기간 절차적 적법성이 보장된 체포 및 구금 관련 서류 등이 없고, 사후 구속영장이 아닌 통상의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한 점, 신청인들의 체포 및 연행 상황에 대한 진술이 구체적이고 상세한 점 등을 종합할 때, 김명인·이원주는 각 35일간, 김회경은 36일간, 현무환은 7일간, 최영선은 11일간, 김창호는 30일 이상 영장 없이 구금된 상태에서 수사받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처럼 수사기관이 대상자들을 불법구금한 것은 형법 제124조의 불법체포, 불법감금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 신청인들은 당시 수사과정에서 폭행 및 협박 속에서 진술서 작성을 강요당했으며, 잠 안 재우기, 고문의 일종인 통닭구이나 관절 꺾기 심지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더욱이 일부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이었던 이근안 등 자신을 고문한 경찰을 특정하였는데, 그는 이 사건 수사 공로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신청인들은 경찰·보안사에 불법적으로 연행·구금되어 있는 동안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김명인 명예교수는 22일 한겨레에 “반파쇼 학우투쟁선언은 단순한 반정부 유인물이 아니라 파쇼집단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격렬하고도 급진적으로 선동해 결과적으로 서울대 내 존재했던 반지하 지도부를 광범위하게 색출하도록 만들었던 사건”이라며 “우리들의 싸움이 전두환 신군부의 부당한 정권탈취에 대한 정당한 시민적 저항이었음이 재확인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무림 사건의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 전문.
팔레비와 소모사를 능가하는 악랄한 살인마 전두환에 맞서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몸바친 2천여 광주의 넋 앞에 이 글을 바친다.
<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
이 땅의 민주주의는 과연 죽었는가? 한 줌도 채 안되는 반민족 파쇼지배집단의 물리적 탄압에 파시스트 언론의 조직적인 선전 음모에 의해 그 정신을 압살당하고 있는가? 일껏 축적된 투쟁 역량은 이대로 와해되고 말 것인가? 혁명적 열기와 반동적 폭압의 크나큰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도 의연히 자리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가?
이제 역사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투쟁을 통절히 반성하고 변화된 상황에 응전하는 우리의 새로운 자세 확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싸움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적의 숨통을 철저히 조일 수 있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투쟁을 위한 몇 가지 이해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적은 누구이며, 그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의 명백한 적은 민중의 포위공격으로부터 기본적 수탈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국내의 매판 지배세력으로서 국내 매판 독점자본, 매판 관료집단, 매판 군부 바로 그들이다. 한국의 정치사는 바로 이 세 개의 매판집단의 역학관계의 변천사에 불과하며 10.26에서 5.17까지의 과정은 곧 그러한 역학관계의 또 한번의 재편성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민중에 대해서는 항상 단일한 한 개의 적임을 명심하여야 하며 그들 내부의 갈등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70년대를 점철한 한국 민중의 투쟁에 절막한 위기를 느낀 결과 10.26이라는 예방조처를 취하여 한국의 지배체제를 재편성, 새로운 파쇼정권을 밀고 있는 미국이 언제까지나 영원한 우방일 수 있을까? 그들도 한국 민중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지 않고서는 우리 투쟁의 화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재편된 적은 기득권 방어를 위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역사상 민중의 혁명적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등장하는 반동정권은 항상 중요한 내적 모순을 안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기본적 생산관계를 보존, 강화해야 한다는 측면과 상승된 민중의 요구를 표피적, 부분적이나마 수용해야 한다는 두 측면의 모순 대립이다. 이는 반동정권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며 우리 투쟁의 가장 중요한 잇점을 형성하게 된다. 먼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적들은 경제개발계획 이후 형성되어온 재생산구조를 온존한 채, 자본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켜 가고 있다. 최근 진행중인 중화학공업 재편성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들은 70년대의 비교적 독립성을 가진 십여 개의 독점자본의 총체로서 성격지어진 한국의 자본을 하나로 통합한 국가자본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는 개별 독점자본간의 과당경쟁을 막고 대외 경쟁력을 향상시키며 해외자본과의 복잡한 지배,종속관계를 커다란 덩어리로 재편시킴으로써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포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화는 적들이 내부모순을 극대화시키면서 도달하는 최후의 형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적들의 긴박한 경제전략과 표리를 이루며 나타나는 파멸적 자기모순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의 국가자본에로의 집중은 중소자본가층의 현저한 분해를 야기하며 노동의 집중적 수탈을 감행하게 한다. 이는 사회구조의 첨예하고 대립적인 이원화 현상을 우발하여 적들은 점차 고립화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물적 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자기 파멸의 길이 되는 것이며 민중승리의 혁명적 비젼이 되는 것이다. 정치는 경제의 집약적 표현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정치적 외피는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국가독점자본을 물적 기반으로 하고 물적 기반을 박탈당한 중산계층의 불안의식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고도의 폭력적 정치형태이다. 그것은 폭력과 기만을 그 통치기술의 근간으로 하는바 군부가 현 지배세력의 정점에 서서 총칼로 만능을 삼는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이며, 언론을 통폐합함으로써 대중조작을 통한 우민화를 수행하기 위한 선전 및 조작도구를 완전 장악한 것이 현 지배세럭의 파쇼적 성격의 두 번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기본적 생존권과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에 대한 민중의 뜨거운 열망을 부정하여서는 최소한의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 적들의 현실인 것이다. 소위 ‘민주, 정의, 복지’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갖는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중의 피어린 욕구의 집약적 표현임에 틀림없으며 적들도 그 내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주적일 수 없고, 정의로울 수 없으며, 민중복지와는 무관한, 더구나 민족적일 수는 더욱 없는 매판적 파쇼군사정권이 어떻게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셋째, 우리는 5월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궁극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수탈체제에 의해 기본적 생존권조차 부정당하는 노동자 농민 등 근로대중과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지식인세력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외세와 국내 매판지배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일체의 분단의 조건들을 분쇄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민중의 통일을 성취하는 위대한 민중투쟁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어렵고 긴 투쟁의 과정이다. 79년 후반에서 80년 초까지의 그 격동의 시기 역시 이러한 커다란 과제의 수행이라는 맥락에서 조명해 보아야 한다. 1980년의 시작은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보다 견고한 지배체제의 구축을 의미했고, 유신체제하에서 소외당했던 정치세력에게는 정권의 장악을 의미했으며, 우리에게는 민중의 투쟁을 보장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와 헌법기관의 구축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의 구체적 전개과정 속에서 그러한 기본목표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첫째, 우리는 적의 본질과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둘째,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여 민중들과 결정적으로 유리되고 말았다. 셋째, 학생대중은 전체 역량조차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학생운동이 70년대 이래로 지녀온 이념과 투쟁역량의 한계 그 자체였다. 70년대의 운동 전체가 갖는 비민중적 무책임성의 요소가 바로 광주항쟁의 실패라는 교훈으로 나타났으며 5.17구테타의 성공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광주항쟁은 투쟁 내용의 급격한 진전을 수용하고 주도해 나갈 담당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 없이는 현재의 적을 섬멸할 수 없다는 70년대 운동 전체에 던지는 우리 민중의 피의 선언인 것이다.
넷째,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5.17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이미 적들은 우리 민중의 명백한 피의 원수로서 집중적 타도의 대상으로서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투쟁은 광범한 민중연합이 매판파쇼지배세력을 어떻게 섬멸하느냐의 본격적인 반파쇼투쟁이다. 그 반파쇼투쟁의 주체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근간이 될 근로대중이어야 한다. 조직된 근로대중의 지도력에 의해 주도될 때 비로소 반파쇼투쟁은 확실한 전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근로대중에게 그러한 지도력이 부재하다는 데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적들은 이미 국가를 폭력기구화함으로써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나가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의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사회보호법 등은 그들의 준비작업의 일단편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 우리 근로대중의 조직화, 세력화가 명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과연 역사적으로 부여된 당면투쟁을 주도해 나갈 것인가? 이를 수행할 추진력은 현재 유일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학생운동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학생운동은 산발적 투쟁의 한 요소가 아니라 전체투쟁을 진행시키는 주도체로서 자기변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역사적 요구는 학생운동의 양적 확대와 질적 심화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1. 근로대중에 대한 정확한 연구(?)와 그들과 더불어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실천적 전투력의 강화이다. 이에는 한국사회의 경제적 모순구조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구체적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 학생운동 역량의 양적 확대와 질적 심화가 어디서든지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투쟁역량을 통일적으로 적에 대한 투쟁을 향해 전개해야 한다.
3. 간단없는 투쟁의 전개이다. 투쟁역량의 승화로부터 지속적이고 철저한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학생대중은 항상 투쟁의 자세를 가다듬과 상황의 전개에 임해야 한다.
4. 시위만능의 투쟁관은 타기되어야 한다. 시위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전술적 요소와의 전체적 고려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학생운동은 적들에 대한 탄력적인 전체적인 응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한 모든 전술적 요소의 개발은 집중적 과제이다.
5. 학생세력의 민중운동에의 수렴과정이 보다 집단화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반파쇼민중연합이 이념적, 조직적으로 성숙될 것이다.
5.17 이후 극렬한 탄압 속에서도 계속 투쟁을 전개해 온 경희대, 한신대, 고대, 동대, 국민대, 성대, 연대, 숙대의 학우들에게 늦게나마 뜨거운 격려의 뜻을 보낸다. 아울러 해외에서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많은 애국동포와 그밖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도 감사하며 계속적인 성원을 부탁한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적의 숨통을 조여가는가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운동은 어떠한 내적 준비를 해 나가야 하는가이다. 그것은 당면한 투쟁의 외면이 아니다. 바로 당면한 투쟁의 시작이며, 투쟁의 심화과정인 것이다. 우리 민중의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민주학우여! 반파쇼투쟁에 모두 참여하자!
1980.12.11.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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