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윤, ‘실버’ 회화로 시간의 흔적을 붙잡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빛은 기억을 반사하고, 회화는 시간을 보존한다.
서울의 회색빛 풍경과 그 안에 잠든 감정의 층위를 색과 붓질로 되살려온 작가 구지윤이 개인전 ‘실버(SILVER)’로 돌아왔다. 전시는 23일부터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빛과 시간의 투영체’를 주제로, 신작 추상화 21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 ‘실버’는 단지 색의 이름이 아니다. 작가에게 그것은 ‘시간의 반사’이자 ‘기억의 흔적’이다. 구지윤은 서울 도심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정서를 포착하고, 회화적 언어로 사라져가는 감각과 존재를 기록해왔다.
“생멸을 반복하는 건물과 구조물, 일상 속 장면들을 유기체처럼 바라보며, 도시는 결국 한 생명체의 궤적처럼 기억 속에 남는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는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 다세대 주택으로 둘러싸인, 다소 당황스런 장소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고분을 지나며, 이 도시가 얼마나 많은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지 새삼스레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익숙한 주변의 도심 풍경이지만, 이곳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서울이 존재한다. 오랜 시간을 견디며 남겨진 것은 거의 없지만, 신축 공사 중 우연히 드러나는 과거의 흔적들을 마주할 때, 수천 년의 시간과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얇고 취약한 층을 이루며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작가 구지윤)

‘빈티지’, ‘파티나’, ‘빛바랜 실버’, ‘화석’ 등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 제목만으로도 시간의 축적을 암시한다. 화면 위에 쌓인 물감의 층위, 겹쳐진 붓 자국은 도시의 감정 지형을 회화적으로 환기시킨다.
작가는 회화를 “시간이 스며든 장(場)”이라고 정의하며, “지금 여기를 그리는 일은 단지 풍경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시간의 흔적을 붙잡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는 서울의 색을 ‘그레이’와 ‘실버’ 사이에서 고민한다. “회색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불투명한 삭제의 색이라면, 은빛은 과거의 흔적을 반사해 잠시나마 되살리는 감각의 색”이라는 설명이다.

"나는 지금, 여기를 그리려 한다. 회화로 그것을 남기는 일은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흔적을 붙잡는 일이다. 마치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화석이 되어 미래로, 현재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현재의 것을 기록하고 견고하게 물질화하여 내일 혹은 더 먼 미래로 보내 그것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작가 구지윤)구지윤의 회화는 과거와 현재, 소멸과 축적, 익숙함과 낯섦 사이를 유영한다. 회색 도시 위로 번지는 실버의 파편은 사라진 것들의 잔광처럼 반짝인다. 그 빛은 기억을 흔들고, 색은 욕망처럼 긴장한다. 도시는 침묵하지만, 그 표면 위에서 감각은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전시는 6월 7일까지.

작가 구지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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