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청년 김구 지킨 전남 보성 쇠실 마을

이건상 기자 2025. 4. 2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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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찾아온 청년 탈옥수 45일간 주민들 쉬쉬하며 지켜내
함평, 강진, 보성 거쳐 마을로 잠입…정말 지원조직 없었을까
종씨만으로 설명 안돼 동료탈옥수, 동학교도 등 접촉 기록
고종 독립협회 해산 등 친위쿠데타 …1870년대생 꿈 사라져
1898년 5월, 청년 김구가 숨어 지냈던 쇠실마을 김광언의 집. 맨 왼쪽 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치하포 사건의 주범, 청년 김창수가 45일간 숨어 지낸 마을이다. 청년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된 백범 김구였다. 마을 입구부터 '백범 김구 은거지'라는 설명문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은거지라, 숨어지낸 곳이라는 뜻인데 요즘 젊은이들이 쉬 이해할까 의문이다.

보성읍과 보성 예당 사이에 쇠실쉼터가 있는데, 그 근처가 쇠실마을이다. 마을 뒷산 해발 445m 대룡산이 집들을 감싸고 있다. 동네 앞은 반섬산이다. 마을로 들어오려면 지금도 국도 2호선 밑 터널(토끼굴)을 지나야 한다. 예전에는 산길을 타야 했다. 마을 앞뒤에 산이 감싸고, 들고나가는 길을 토끼굴이니 도망자가 숨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터다.

#김두호 가명 안동김씨 집성촌 찾아와

1898년 음력 5월, 한 청년이 불쑥 마을을 찾았다. 23세 청년의 행색은 반듯한 품새는 아니었을 성 싶다. 백범일지를 보면 '나의 행색으로 보면 누가 보든지 참 도적놈으로 보기 쉽다. 염병 후에 머리털은 다 빠지고 새로 난 두발은 소위 솔잎상투(짧은 머리를 끌어 올려 튼 상투)로 꼭대기만 노끈으로 졸라매고 수건으로 동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자신을 김두호라 했다. 본명은 김창수였다.

그는 쇠실마을 오기 전 함평에서 보름을 머물렀다. 육모정 이 진사 집에서 과객으로 하룻밤을 청했는데, 마음이 맞다 보니 간청에 못 이겨 보름을 지냈다고 한다. 백범일지에는 '육모정이 이 진사의 정자로,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양실이 구비돼 있다'고 소개돼 있다. 육모정은 함평읍에 있는 한옥 건물로 한말 은율군수를 지낸 이동범(1869~1940)이 건립했고, 아들 이재혁(1893~1992)이 거주했다. 백범이 언급한 이 진사는 아들이었다.

백범은 함평 전에 목포를 찾았다. 목포에서 함께 인천감옥을 탈옥했던 양봉구를 만난다. 그에게서 약간의 여비를 받아 광주를 거쳐 함평에 다다랐다고 한다. 목포 직전에는 남원, 금구를 갔는데, 그곳에서 지인을 수소문했다.

백범일지에 김형진으로 나온다. 길에서 우연히 동생을 만나 그의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수일을 지냈다. 백범이 삼남 지역 여기저기를 다닌 것은 잠행이자, 일종의 '도바리'(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은어로 수배를 피해 다니는 것)였다.
 

청년 김구가 머물렀던 쇠실마을 우물.

# 국모 시해범 처단 후 인천감옥서 탈옥

1896년 3월, 김창수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여관에서 일본군이 분명한데 한복을 입고 조선인 행세를 하는 의문의 한 사람을 만난다. 이자가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또는 적어도 공범일 것이라고 판단, 그를 처단한다. (치하포 사건) 그는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수감됐다가 인천 감옥으로 이감된다.

일본측은 참형을 주장했지만, 조정은 그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응징범 임을 감안, 사형을 보류하라고 명 한다. 김창수는 인천감옥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의로운 행동에 격려하는 이들도 많았다. 구명운동에 나선 이들도, 아예 탈옥을 권하며 지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1898년 3월 19일 인천감옥을 탈옥, 삼남지방으로 숨어들어 간다.

김두호로 신분을 감춘 김창수는 쇠실마을 김광언의 집에 머문다. 지금은 기와집이나, 당시에는 비교적 큰 5칸짜리 초가집이었다. 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이었다. 백범도 안동김씨였으니, 종씨였다. 집 뒤로는 바로 산이라서 위급할 때에는 피하기에 적당했다. 백범일지에 한줄로 표기될 정도로 짧게 언급돼 쇠실마을의 활동을 그리기가 쉽지 않다.

김구 잠행 경로도

#청년 백범 삼남 잠행에 든 의문점 3가지

백범의 쇠실마을 등 전남 은거지에 세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누가 함평, 강진, 보성의 은거지들을 연결하고, 알려줬을까. 평소 안면이나 왕래가 전혀 없었던 황해도 출신 20대 청년을 안동김씨 종씨라는 단 하나의 이유와 인연으로 수십 일 동안 먹여주고 재워줄 수 있을까. 더욱이 그는 일본인 살해범에 탈옥수로 마을주민들은 범인 은닉죄로 중벌을 면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백범일지에는 은거지의 미스터리를 풀어 줄 해답이 나와 있지 않다. 오직 종씨였다는 설명 뿐이다.

혹여, 백범의 삼남 잠행을 조직적으로 지원해준 지원그룹이나 인연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백범일지에서 보이는 잠행의 인연자들은 '종씨'이거나 '동료 탈옥수', '동학교도'였다.

목포에서 만난 양봉구는 동료 탈옥수였고, 남원 금구에서 찾은 김형진이란 인물은 동학 주요인물이었다. 그가 인천감옥에서 탈옥해 남부지역을 돌면서 목포에 있는 동료 탈옥수를 만났다는 건 선이 있거나, 일종의 네트워크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양봉구도 김형진처럼 동학과 연계된 인물이었는지 모르겠다. 김구도 한때 애기접주로 불린 동학교도였다.

백범일지 상권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7년 작성된 만큼,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들의 비밀스런 얘기를 속시원하게 풀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진-함평-보성으로 이어지는 백범 은거 루트의 비밀이 풀리길…..

쇠실마을에 문을 연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둘째, 45일 동안 외지인 청년 백범과 안면을 익힌 쇠실마을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전혀 몰랐을까. 적어도 외지인이 우리 마을에 불쑥 찾아왔다면,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우리 동네 누구와 친인척인지 꼬치꼬치 캐묻는게 우리네 실상 아닌가.

청년 김두호는 김광언 집에서 은거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백범은 떠날 때에야 '내가 일본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며 이별시 격인 離別難(이별난)를 남겼다.

# 고종 독립협회 간부 체포 친위쿠데타 '격동'

셋째, 청년 김구는 잠행 중 정말로 세상과 차단했을까. 그는 국모 살해범을 응징했고, 고종이 직접 사형을 중단시켰으며, 주변의 조직적인 지원으로 탈옥에 성공한 어쩌면 전국적인 유명인사였다.

그가 삼남을 돌아다닐 때 1898년 조선은 들끓고 있었다. 그해 독립협회에 집결한 개화파들은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마저 밀어내고자 했다. 3월에는 러시아가 절영도 조차와 군대 주둔을 계획하자 독립협회 청년 엘리트들은 종로에서 사상 초유의 대중집회를 조직했다.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인 1만 여명이 운집했다.

만민공동회는 숭례문, 종로에서 연일 개최됐고, 이슈도 국토 조차 반대, 철도, 전신부설권 양여반대, 무관학교 학생선발 부정 비판 등 다양했다. 개화파 정부와 독립협회는 11월5일 의회를 설립한다는, 사실상 입헌군주제를 도입한다는 혁명적 조치를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고종은 11월4일부터 5일 새벽에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의회 설립을 취소했다. 일종의 친위쿠데타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독립협회 복구와 의회 재설립을 요구했다.

박훈 서울대교수는 "개화파와 서울사람들은 12월23일까지 한국사상 최장기간의 철야시위를 벌였으나, 고종은 2000명의 보부상과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기습하고 430여명의 개화파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고 밝혔다. (언론 칼럼, 아~1898년)

1946년 9월22일 해방 후 귀국해 쇠실마을 김광언씨 집을 다시 찾은 백범 김구.

쇠실마을 떠난 백범은 어디로 갔을까. 백범의 동시대 동지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서울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이승만(1875년생), 평양 만민공동회의 스타 안창호(1878), 한때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인을 처단하며 개화에 눈을 뜬 김구(1876), 황해도의 개화파 안중근(1879).

이들 1870년생들이 꿈꿨던 조선의 꿈은 무너져버렸다. 그것도 황제의 친위쿠데타로…. 이승만은 감옥으로, 안창호는 미국으로, 김구는 절로 몸을 숨겼다.

보성 쇠실마을에 서니 생각이 많아진다. 1870년대 생의 그랜드 비전, 김구의 숨은 조력자들, 그리고 정말 쇠실 사람들은 김구 정체를 몰랐을까….

알았으니 그를 지켰을 테다. 그렇다. 숨어지낸 은거지가 아니다.미래 임정 주석 백범을 지킨 쇠실마을~!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길 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