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언론은 정치 세탁소가 아니다

채영길 2025. 4. 2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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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은 정권 교체가 목표가 아니다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전원일치로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그날, 국민은 2024년 갑진년의 12.3 정변이 단순한 정치적 해프닝이 아니라 명백한 내란 기도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는 123일간의 지옥 같았던 탄핵 정국의 큰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일단락(一段落), 말 그대로 일의 한 단계를 지났을 뿐이며, 우리는 곧 대통령 선거라는 다음 국면으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다.

21대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위한 선거가 아니다. 비록 대통령 선거가 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고도의 권력 쟁투의 공간이라 하더라도, 이번 선거는 그리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23일간 거리에서 매일 시민들이 외친 것은 이번 선거는 정권 교체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언론은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친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 세력과 ‘정치’라는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가? 아니, 공유해야 하는가? 과연 그들은 정당한 정치 경쟁의 대상인가? 그리고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과연 그들이 내세운 대선 ‘후보’의 경합을 지켜보며, ‘선택’이라는 이름의 부조리를 감당해야만 하는가?

극우보수 재결합의 정치

이 질문들에 대해 비록 논쟁적일 수 있으나,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을 ‘후보’로 부르는 행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라고 답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은 정치적 경합의 상대가 아니라 단절의 대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123일의 낮과 밤을 거리에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해방정국의 반역사적 세력, 군사독재의 잔재, 그리고 12.3 계엄 기도에 이르기까지 단절하지 못한 과거는 언제든 정치적 욕망의 이름으로 귀환한다는 교훈이었다. 시민들을 매서운 남태령의 겨울 칼바람 속으로 내몬 공권력의 모습에서, 윤석열 구속을 막아선 극우보수 정치인들의 행보에서, 그리고 서부지방법원을 폭력으로 파괴한 잔인한 극우 집단의 만행 속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제 우리는 안다. 민주주의가 단절할 용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민주주의가 단절을 요구하는 이 시점에서, 정작 언론은 단절이 아니라 재결합의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헌법 세력과의 정치적 공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언론의 ‘호명 권력’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선거 보도라는 ‘저널리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정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반헌정·반민주 정치 집단을 다시 합법적 경쟁자로 활보하게 만든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언론이 사용하는 ‘후보’라는 단어 역시 무심하게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후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순간 극우 보수의 정치적 복권을 수행하는 상징 기계가 작동함을 인지해야 한다. 12.3 계엄령 시도를 은폐하거나 침묵했던 정치인들에게 어떻게 대선 ‘후보’라는 공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가? 언론은 이들에게 후보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다시 공적 무대 위에 올리고, 정당한 정치의 경합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많은 보도의 관습적 정치 언어는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언어로 저들을 설명하는 순간 언론은 지난 123일의 과오를 사면해주는 정치적 면책 선언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언론이 극우보수 재결합의 정치 기계는 아니지 않은가?

2023년 미국 CNN은 트럼프의 성폭력 손해배상 판결 다음날 그를 생중계로 방송했다. 이 방송에서 그의 혐오 발언과 거짓 주장이 실시간으로 별다른 반론 없이 전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CNN으로서는 흥행의 모든 조건을 갖춘 방송이었다. 하지만 CNN은 이를 통해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위협이 아니라 ‘파격적’이고 ‘비정통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그를 정상적 정치 경쟁자로 승인하고 있었음을 간과했다. 그의 인종·성차별 발언을 조롱하는 듯 보이면서도, 대선 레이스의 ‘정당한 후보’로 호명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다른 언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 언론들은 매일 경쟁적으로 여론조사 변동, 바이든의 건강 문제, 트럼프의 ‘에너지’를 보도하면서도 정작 트럼프의 미국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에 대한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가 없는 듯이 보였다. 트럼프의 복귀는 미국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이겠지만, 그 실패를 완성시킨 것은 언론이었다. 결국 언론 보도는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며, 그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유권자들에게 그의 대선 도전이 정당하다는 사실상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2024년 가을,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미국 시민과 지식인들의 분노는 언론으로 향했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트럼프를 다시 ‘합리적’ 정치 행위자로 정상화시킨 언론의 책임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소적 지식인들은 이 보도 관행을 “정상성 세탁(Sanewashing)”이라 불렀다. 검은 돈을 세탁해 유통시키듯, 미국 언론은 극우 정치 세력을 ‘파격적’이라 부르며 주류 정치에 편입시켰다는 뜻이다. ‘그린와싱(Greenwashing)’이 기업이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실제보다 더 환경친화적으로 위장하는 기만 담론이라면, ‘Sanewashing’은 극우 정치를 정상 정치로 둔갑시키는 기만적 보도 전략인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와 같은 비정상적 정치인을 정당한 대선 후보로 인식하게 만든 언론의 책임을 이 단어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4월 4일 윤석열은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Journalismwashing: 저널리즘의 알리바이

하지만 정상성 세탁은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123일간의 탄핵 정국 동안, 한국 언론은 극우 정치의 복권을 위한 ‘Sanewashing’의 교과서적 사례들로 넘쳐났다. “계엄령은 계몽이었다”는 윤석열 측의 주장을 비판 없이 보도하고, ‘애국심’과 ‘법치’라는 오염된 언어로 정변 세력을 포장했으며, ‘논란’이라는 탈정치적 표현으로 진실을 흐렸다. 내란 기도자들의 ‘입장’을 따옴표로 포장한 보도는 중립을 가장한 공범적 서사였다. 서부지방법원 폭력 침탈 당시, 이를 지지하거나 정당화한 윤석열과 극우 동조세력들의 발언을 마치 생중계하듯 보도하였다. 그리고 언론은 “중요한 정치인의 발언”, “양측 보도”, “국민의 알 권리”라는 언어로 스스로에게 면책을 부여하였다. 이 모든 말들은 ‘정상성 세탁’의 알리바이 언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그들은 몰랐을까?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행위를 단순한 보도 관행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이는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을 정당한 정치인으로 복권시키는 저널리즘 세탁(Journalismwashing)인 것처럼 보인다. 정상화 해서는 안될 정치 세력을 보도하면서 마치 그 보도가 저널리즘의 규범에 부합하고 저널리즘의 원칙에 기반한 것처럼 포장하는 태도는 저널리즘을 면피의 대상으로 삼고 저널리즘의 책임을 기만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시기에 위기를 조장한 이들을 정상화 시키는 보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저널리즘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위기의 시기, 가치 중립적 보도는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 위기를 조장하고 방조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중립은 책임을 지워버리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다.

정치적 범죄를 ‘신념’으로, 극우 폭력 세력을 ‘경합’ 가능한 정치 세력으로 둔갑시키는 언론의 언어들은 결국 대통령 선거라는 무대에서 민주주의 파괴 세력을 ‘후보’로 세탁하는 데 복무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복귀는 이러한 언어들 속에서 가능했다. 그렇기에 언론은 저널리즘을 알리바이로 삼아 민주주의 파괴 세력을 정당화시키는 세탁 작업에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저널리즘이 위기의 주체들에 대해 침묵과 단순 중계 그리고 중립적 관행 보도를 하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 위기의 정치적 공범이 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언론은 계엄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언어를 민감하게 회피하여야 하며, 이들에게 ‘정상적’ 보수의 자리를 내어주며 정치적 세탁을 해서는 안 된다. ‘대선 후보’라는 호명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헌정 질서를 수호할 자격이 있는 정치인에게만 부여되어야 한다. 정치적 정당성은 정당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은 민주주의 위기에서 출현해야 할 후보와 그 후보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가치와 언어가 무엇인지를 앞다투어 보도해야지 관행적 선거 경마식 보도를 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언론은 선거가 민주 시민의 권리임을 인식하고 시민들에게 선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선거는 언론이 만드는 정치의 난장판이 아니다.

기고자 : 채영길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뉴스타파 채영길 chaeyounggi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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