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하죠

하영란 기자 2025. 4. 2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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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넘기기 55
김영하 산문집 「단 한 번의 삶」
'나'는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 총합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운이 크게 좌우
지나친 모범생 사는 것 활력 잃은 삶일 수 있어
김영하 산문집 「단 한 번의 삶」책 표지.

김영하의 산문집 「단 한 번의 삶」(2025, 복복서가)은 한 번 잡으면 그 자리에서 다 읽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내려놓으면 다음이 궁금해진다. 이 책은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청소기 안으로 빨아들이듯이,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유와 성찰의 눈으로 쓴 글이다. '이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고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난 두 분에게' 바치는 글이다. 보편적 사고와는 다른 부분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설득력이 너무 강해서, 그러나 아주 부드럽게 강하다.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작가 김영하가 된다. 김영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그러다가 차츰 '나'로 돌아와 지금까지 나는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를 생각하며 다시 살아온 날들을 다른 시각으로 더듬게 된다.

김영하의 이 책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 묘한 치유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실수해도 좋다, 목숨 걸고 숨기고 싶은 비밀도 타자의 시선으로 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 모범으로 산다는 것이 꼭 답은 아니라는 것,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김영하의 산문집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밑줄 긋고 포스트잇을 붙인 부문이 많았다. 책에서 손꼽히는 부분들을 지면에 소개한다. 소개한 부분만 읽어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삶은 부조리고, VIP로 대접하고 받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지나친 모범생으로 사는 것은 활력 잃은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도덕적인 삶도 환경이 받쳐줘야 한다. 그렇다고 환경만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고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워야, 접해야 우리는 실천하고 비로소 그 사고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멕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이 부조리에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어떤 비밀들, 생각지도 않은 계기에 누설되고야 마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비밀들까지 더해진다.('엄마의 비밀')

의료계에 VIP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반가웠다. 이 증후군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의사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 특히 본인의 가족을 수술해야 할 때 의사들이 긴장하고 부담감을 느껴 도리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내는 현상을 말한다. 부담감도 부담감이지만, 환자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검사를 누락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VIP 증후군은 과연 의료 현장에서만 일어날까? ('야로의 희망')

교실 앞 복도에는 뭘 잘못했는지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든 채 벌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뭐가 즐거운지 자기들끼리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키득거렸다. (…)

아이들은 짐짓 엄숙한 얼굴로 꿀밤을 견뎠지만 웃음을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안에는 멍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착한 아이들이 있었다. 활력이 넘치고 신나 보이는 애들은 오히려 밖에서 벌을 서는 아이들 쪽이었다. 그들은 교실 안의 우리를 전혀 부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탈')

아리스토렐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행복)'은 완전한 삶을 통해 덕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인데, 덕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올바른 양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행위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니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운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범죄자가 되지 않고 선량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칸트적 '선한 의지'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운'에 따라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다. ('도덕적 운')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세상을 읽는 것이고, 타인을 마음으로 재단하는 것이고, 관계를 맺는 것이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발빠르게 움직여서 벌써 이 책을 손에 넣고 곱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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