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웠던 작품, 빛의 도시 파리에서 색채·광채 담아내다

이성현 기자 2025. 4. 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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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그리는 화가, 반 고흐 ②파리 시기(Paris Period)
인상주의 화가와 교류 내면의 예술적 갈등 해소
다양한 표현방식에 매료… 그만의 '점묘법' 탄생

파리는 예술과 사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 시기(1886-1888)를 전후해 전환점을 맞는다. 어둡고 무거웠던 네덜란드 시절의 색조는 점차 밝아지고, 주제는 농촌에서 도시의 삶과 자연으로 확장된다. 색과 빛, 자화상과 해바라기, 그리고 고갱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고흐의 파리 시기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 찬란한 시간이었다.

① 몽마르트 언덕(The hill of Montmartre), 38.1 x 61.1cm, 1886,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 시절 동안 몽마르트의 언덕에 자리 잡고 생활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제공

◇파리에서 예술의 문을 열다

1886년 3월, 서른셋의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생 테오와 함께 살며 예술적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파리는 세계 예술과 사교 문화의 중심지였고, 몽마르트르는 심장부였다. 르 샤 누아르(Le Chat Noir) 같은 카바레(음악, 노래, 춤 등의 공연이 이뤄지는 엔터테인먼트 형태의 술집)는 단순한 유흥 공간을 넘어 예술과 문학, 풍자와 실험 정신이 뒤섞인 창작의 허브로 기능했다.

그는 파리의 분위기에 빠르게 매료됐고, 이미 성공한 화가가 된 듯한 착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고흐는 기본기 부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인물화를 지속하기 힘들었고, 고액의 모델료는 그림을 그리는 데 큰 걸림돌이었다.

네덜란드에선 약간의 돈만 있어도 모델을 구할 수 있었지만, 예술가가 넘쳐나는 파리에선 무명 화가에게 기꺼이 포즈를 취해주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정물화로 눈을 돌리게 됐고, 이는 새로운 색채와 기술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인상주의와 점묘법 속에서 피어난 고흐의 색

파리는 고흐에게 '빛'의 도시였다. 이전까지는 네덜란드 대가들의 영향을 받은 어두운 톤이 그의 작업을 지배했다면, 파리에서는 색채와 광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익히게 된다.

단순한 외형의 전환이 아닌, 그가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내면의 예술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테오가 소장한 아돌프 몽티셀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독창적인 임파스토(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를 탐구했고, 외젠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색채 감각에도 매료됐다. 클로드 모네, 에드가르 드가, 알프레드 시슬레, 카미유 피사로 등 인상주의 거장들의 작품은 그에게 새로운 색채 감각과 빛의 표현 방식을 바꿔놓았다.

또 이 시기는 '점묘법'이 미술계에서 주목받던 시기였다.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과학적 색채 실험은 빈센트에게 도전과 자극을 동시에 안겼다.

다만 그는 점묘법을 온전히 따르지는 않았다. 점묘법이 보여주는 정밀함, 질서와는 달리 고흐의 붓질은 감정적이고 역동적인 선과 터치로 이뤄졌으며, 이 과감한 자유는 오히려 그만의 회화적 언어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고흐는 테오가 원하던 '팔릴 수 있는 그림'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시도이자, 빈센트 자신이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흔적이기도 하다.

③자화상(Self-Portrait), 32.8x24㎝, 1887, 그는 붉은 머리칼과 초록빛 배경, 대비되는 보색의 조화를 통해 감정의 깊이와 시간의 흐름까지 담아내려 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제공

◇자화상, 내면을 마주하다

모델을 구할 수 없는 경제적 제약 속에서 고흐는 새로운 자기 자신을 향해 붓을 들었다.

또한 그는 파리에서만 약 25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제작하며 내면의 혼란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화폭에 담았다.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재현을 넘어, 기존 미술의 전통을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수련의 장이었다.

자화상 속의 그는 때로 붓을 들고 있고, 때로 초점 없는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붉게 상기된 얼굴과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배경은 내면의 불안과 예술적 갈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그는 테오와의 불화, 상업적 실패에 대한 좌절,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갈망을 화폭에 직접 마주하게 된다.

그는 붉은 머리칼과 초록빛 배경, 대비되는 보색의 조화를 통해 감정의 깊이와 시간의 흐름까지 담아내려 했다. 빈센트에게 자화상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고백이자, 동시에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고독한 선언이었다.

고흐는 새로운 시도를 거듭한다. 동료 화가 샤를 앙그랑과의 교류를 통해 '사고'라는 작품을 주고받으며 밤의 풍경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인상주의의 기계적인 점묘법과는 맞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받은 자극은 이후 아를 시기의 걸작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 일본 판화의 위안, 아를을 향한 결심

파리에서의 2년은 고흐에게 실험과 변화의 연속이었다. 고흐는 모델을 구할 수 없는 경제적 제약 속에서 '꽃'과 '자기 자신'이라는 두 대상을 반복해 그렸다. 꽃은 그에게 색채와 질감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였다.

이 시기 그는 다양한 꽃 정물화를 제작했고, 이는 훗날 '해바라기' 연작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초석이 된다. 특히 장미와 해바라기를 함께 그린 정물화에서 시작해, 점차 해바라기 하나에 집중해가는 과정을 통해 고흐는 자신만의 상징을 만들어갔다. 초기엔 가로 구도에 바닥에 놓인 형태였지만, 이후 아를 시기의 해바라기는 세로 구도의 꽃병에 담긴 형태로 진화하며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화려한 색채 실험 이면엔 내면의 피로와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이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 특히 우키요에에 깊은 위안을 받는다. 평면적인 구도, 또렷한 색의 경계, 자연을 담은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장면들은 고흐에게 일종의 예술적 피난처가 돼주었다.

일본 미술은 그에게 단순한 유행이 아니었다. 이는 기존 서양 회화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고,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고흐는 일본 미술을 통해 자신의 회화적 약점을 감싸줄 수 있는 새로운 미학을 발견했고, 이는 그가 끊임없이 추구하던 독창성의 단초가 됐다.

1887년 가을, 테오와의 갈등이 깊어지며 고흐는 파리를 떠날 결심을 굳힌다. 그가 향한 곳은 남프랑스. 오래전부터 일본의 풍경을 닮았다고 믿었던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꿈꾸었다. 돈 걱정 없는 화가들의 공동체, 밝은 태양, 그리고 자유. 고흐는 색채와 태양을 찾아서 아를(Arles)로 떠난다.

⑤석고 조각상이 있는 정물화(Still life with plaster statuette), 55×46cm, 1887, 파리를 떠나기 전 고흐가 테오에게 남긴 일종의 작별 인사로 해석되며, 본격적으로 일본풍 '자포니즘(Japonism)'을 받아들이려 했던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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